• 6.25의 공방전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다시 서울을 내주고 만다. 북진을 거듭하던 아군이 1950년 10월 하순 중공군과 마주친 이래 속수무책, 남으로 남으로 퇴각하던 길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날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다. 중공군은 다음날인 1월 5일 서울로 들어왔다. 이른바 '1.4 후퇴'다. 개전 초 3개월동안 서울을 내줬던 아군은 이후 2달 이상 수도를 적의 수중에 내맡기게 된다.

  • ▲ 1951년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퇴각한 뒤 불타는 서울 여의도 비행장
    1951년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퇴각한 뒤 불타는 서울 여의도 비행장

    그 전해 여름 서울에서 적 치하를 경험한 바 있는 서울시민들은 12월 24일 미리 내려진 시민소개령에 따라 40% 이상이 피난 보따리를 싸고 남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 1951년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퇴각한 뒤 불타는 서울 여의도 비행장
     
  • ▲ ⓒ LIFE 자료사진
    ▲ ⓒ LIFE 자료사진

    국군을 따라 남하한 북한 지역의 피란민들도 다시 짐을 쌌다. 함경도 지방에서 퇴각해온 국군과 유엔군 10만5000명, 피란민 9만8000명도 불타는 함경남도 흥남 부두를 뒤로 하고 차가운 동해 바다에서 남행길을 재촉했다. 이북 출신 실향민의 대부분이 남한에 정착한 계기는 1.4 후퇴였다.

  • ▲ 흥남 철수 당시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는 흥남 부두
    흥남 철수 당시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는 흥남 부두

    하지만 이는 여름의 피난길에 비해서는 지옥길이었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 꽁꽁 얼어붙은 길은 피란민들로 초만원이었다. 파괴된 한강 인도교 아래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피란민 행렬은 남으로남으로 몰려갔다.

  • ▲ 흥남 철수 당시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는 흥남 부두
     
  • ▲ 흥남 철수 당시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는 흥남 부두
     
  • ▲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는 시민들 ⓒ LIFE 자료사진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는 시민들 ⓒ LIFE 자료사진

    열차는 초만원이었다. 객실, 화물칸은 말할 것도 없고 틈만 있으면 어디든 피란민이 몰렸고 화차 지붕 위에도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 ▲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는 시민들 ⓒ LIFE 자료사진
     
  • ▲ 열차 지붕 위에 가득 들어찬 피란민 행렬 ⓒ LIFE 자료사진
    열차 지붕 위에 가득 들어찬 피란민 행렬 ⓒ LIFE 자료사진

    수원 오산까지 밀리던 아군은  장호원-제천-영월-삼척선에서 적군의 침공을 저지하고 반격을 개시, 3월 2일 한강에 도달했고 3월 14일 서울을 다시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