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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명예교수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은 자유민주주의를 확보한 “건
국혁명”이라고 규정했다.당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과 정부 수립 선포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을 탄생시킨 사건으로서 그 자체가 프랑스혁명이나 미국독립혁명과 같은 "성공한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사진)는 한국연구재단 사회과학 웹진 9월호의 석학 칼럼에 기고한 “혁명으로서의 대한민국 건국-거시사적 비교를 통한 건국의 재인식”(http://ssc.nrf.go.kr)이라는 글에서 8.15 정부수립을 이처럼 해석했다.
한국 역사상 유일한 혁명, 역사적 분기점 -
이 교수는 이 글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진정한 전환점이 있다면 그것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 곧 헌법제정과 정부수립 선포였다”며, “그것은 시민혁명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영국혁명,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으로 주창되었던 러시아 혁명 등에 비견될만한 우리 역사상 유일한 혁명이요 역사적 분기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국치일 이래 지난 100년간의 우리 역사의 4분의 3을 실제로 살아왔고 세계사, 그 중에서도 러시아사를 전공하는 사람인 필자가 볼 때 우리 현대사에서 진정한 전환점이 있다면 그것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 곧 헌법제정과 정부수립 선포였다”며, 1948년 8.15의 역사적 의미를 그처럼 완전히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1948년 전후로는 학술적으로 보편성을 지니는 용어로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사건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엄밀한 학문적 정의에 근거할 때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1948년 8월 15일 건국혁명 외에는 혁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혁명의 특성을 골고루 갖춘 세가지이 교수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혁명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그 사건이 혁명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선 혁명은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는 것인데, 그 점에서 “일제 강점기의 우리 사회와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우리나라를 비교해 보면 건국은 권력 주체와 권력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고 그 후 생산관계의 현격한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지는 혁명적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우리가 일제와 미군정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재탄생하여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주권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독립을 향한 온 겨레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왕조시대의 “백성”이나 일제하의 차별 받는 식민지 “신민”, 미군정 치하 “패배한 적국의 전 식민지 시민”의 처지에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으로 승격했으며 바로 그 국민을 자유롭고 평등한 주인으로 인정하는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는 그러한 공화국이 채택한 국가 이상과 이념이 공산주의나 군국주의 식 집산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하고 재산권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였다는 점이었다. 이 세 가지가 다 바로 그 직전 까지 있어 왔던 정치, 사회, 문화적 현실을 완전히 뛰어넘는 획기적인 변혁이었으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이전으로 회귀하기는 결코 불가능한 명확한 혁명적 구분선이 그어진 것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는 엄연히 이승만, 이시영, 이범석 등 항일 독립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척결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을 구실로 그 정부를 친일 반동 정권으로 규정한 것은 반일 정신이나 투쟁의 경력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이었던 가장 큰 이유가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새 나라를 보호해야 될 필요성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당시 더 크고 긴박했던 가치인 ‘반공’을 위한 것이었고, 그러한 이 대통령의 전략적 선택은 당시 친공 좌파세력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을 친일반동정권으로 낙인찍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소련과 앞잡이 북한공산세력의 혁명 방해이 교수는 이어 “대한민국의 탄생을 역사의 중심에 놓고 본다면 분단은 국토와 민족의 일부가 외세(소련)의 압력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혁명적 과업에서 제외되는 운명에 처한 것이었고 북한은 언젠가는 같은 체제 안으로 재통합되어야 할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건국혁명을 방해한 것은 바로 소련과 그 앞잡이인 북한의 공산주의세력이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남한에서 건국을 준비하던 여러 세력들 간에 경쟁과 충돌이 치열했고 결국 좌우익의 첨예한 대결에서 공산주의에 반해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우위를 장악함으로써 대한민국이 탄생한 과정은 다른 나라의 혁명 과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반체제 세력을 내부에 품은 채로 태어났던 대한민국 역시 내란에 버금가는 시련을 계속 겪어야 했다”며, “공산주의 혁명이 내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상응하는 것이 반공독재였으며 결국 폭력은 혁명의 동반자라는 사실에서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러시아에서도 혁명 후 혁명의 이념을 수호하기 위해 독재체제가 등장했던 것을 보면, 대한민국의 건국혁명 후 등장한 반공독재도 역사적으로 볼 때 전혀 예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든 혁명엔 독재 불가피...반공독재는 혁명 수단이 교수는 “일제의 탄압에서 바로 벗어나서 대한민국 건국을 추진하던 세력에게는 소련의 세계공산화 이념과 전략은 외세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지배나 종속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일제시대의 악몽을 되살리기에 충분한 일이었으며 신생 대한민국 내부에 침투해 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폭력적 제압을 정당화 시키는 구실이 되었다”며, “독립국가로 대한민국을 즉각 수립하려는 반탁투쟁 당시부터도 반공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항하여 자유주의 이념을 수호하려는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라는 … 외세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민족생존의 투쟁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정권의 반공노선은 대한민국 건국혁명의 이념이었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소련의 공산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민주당 출신 트루먼 대통령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일본에서 전범 처리와 재벌 해체를 어느 순간부터 유보하고, 유럽에서는 공산화를 막기 위해 마셜 플랜이라는 대대적 유럽재건 지원 프로그램을 단행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교수는 “스탈린 치하 소련의 공산주의 영향을 배격하는 데는 미국인들보다 더 앞서 나갔던 국제정치학 박사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경우 혁명적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사회주의 체제로의 점진적 발전은 오히려 바람직한 대안이라 생각했다”며, “그 증거는 교육권이나 노동권에 관련된 건국헌법의 내용이나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조소앙, 농지 개혁을 추진한 조봉암 같은 인물들과도 공조를 시도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오직 반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아닌 진보세력과는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혁명보다 빨리 인간자유평등 즉각 법제화이 교수는 “대한민국의 건국헌법은 …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이 일찍부터 주창해왔던 이상과 이념을 수용한 것이었다”며, “대한민국의 경우 주권재민의 이상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식으로 정착하는 데는 40년이 걸렸지만 정치참여를 제외한 인간의 기본권 존중과 법 앞의 평등을 대원칙으로 법제화 하는 일은 (1948년 8월 15일 건국 당시에 — 기자 주) 즉각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건국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단계적으로 확대한 것이 아니라 즉각, 완전히 보장했다는 것이다. 그 가장 단적인 예는 제헌헌법에서 바로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을 보장한 것이다.
이 교수는 “세계사적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서구의 선진국들보다는 백 여 년 늦게, 그러나 국가로 독립을 이루지 못했거나 공산주의의 유혹이나 사슬에 걸려들었던 나라들보다는 훨씬 앞서서, 건국혁명을 통해 기본 인권과 정치권을 보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법적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라며, “다만 문제는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지적, 경제적, 문화적 역량이 민주주의 제도의 장점들을 살려내고 약점들을 최소화 시키는 방향으로 그 제도가 운영될 수 있게 뒷받침해 주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데 있었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옮겨 심었지만 그 나무가 자랄 토양은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게 당시의 안타까운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승만 혁명이념 배신한 정치적 학계의 정신혁명을이 교수는 “우리의 경우 도덕적 잣대로 역사를 재단하려는 태도가 학계에까지 만연하게 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분단의 현실에 뿌리를 둔 반체제적 시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약적 경제발전과 사회변화를 따라 잡지 못한 지식인 세계의 의식의 낙후성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그간의 성공은 사회적 역동성에서 나왔으며 그러한 역동성의 배양과 발휘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혁명이었다는 것은 북한의 현실과 대비해 보면 특히 잘 알 수 있다”며,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부정일변도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해석해 온 우리 학계 일부의 자세는 이제 나라의 정상적 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족 통일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세력의 오랜 기간에 걸친 집요한 공세 때문에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민 상당수의 뇌리에는 불행히도 역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뿐 아니라 국가정통성에 대한 의문까지 일고 있는 듯하다”고 말하면서, “학술적 연구의 결과가 정치에 불을 밝혀야지 정치적 염원이나 타산이 학문적 진리 추구의 의욕과 용기를 압살해 버리는 듯한 의식의 역류 현상을 우리 학계가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으로 믿는다”고 역설했다.
<심양섭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