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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을 평양에서 맞이하였습니다. 적위대가 조직되고 인민위원회가 들어서자마자 평양 거리의 모든 담벼락에는 “김구·이승만을 타도하자”라는 표어가 나붙었습니다. 그러나 ‘남북협상’이 시작되던 무렵에 “김구·이승만을 타도하자”라는 표어에서 ‘김구’ 두 글자는 사라지고, ‘이승만’만이 외롭게 남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조국이 해방되기 전 일제 시대에도 두 독립투사의 이름을 우리는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서울에서 46년 남로당이 결성될 때 여운형은 좌익과 손을 끊고 온건파를 규합,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좌우 합작’을 시도하였지만 47년 혜화동 로타리에서 한현우라는 월남한 청년에게 저격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구는 한독당을 조직하고 통일자주독립 노선을 지향, 48년 4월에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을 제안하고 북의 지도자들을 평양에 가서 만나 회담을 했지만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인 49년 서대문의 경교장에서 현역 육군소위인 안두희의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엉뚱한 소문은 그 때부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분이 국가의 진로에 대한 의견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악의에 찬 중상모략은 심지어 안두희가 이승만의 사람이라는 유언비어까지 퍼뜨렸습니다. 이승만이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정권을 잡고 경무대의 주인으로 들어앉은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서 옛 동지를 암살하겠습니까.
3·15 부정선거가 한 시대의 영웅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해야 합니다.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지시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해야 감투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저지른 몰지각한 짓이 아니었습니까. 최인규는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서대문 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김구가 애국자인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밝히 일러줍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불가능한 꿈이었듯이, 김구의 ‘남북협상’도 ‘이루지 못할 꿈’이었습니다. 만일 여운형이나 김구의 의견대로 끌고 나갔으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한반도는 우선 김일성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역사를 대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김구는 높이고 이승만은 깔아뭉개려는 저의가 나변에 있습니까. 김일성·김정일이 김구를 두둔하는 까닭은 알만 합니다. 그러나 박헌영도 해치우는 그 자들이 무슨 짓이야 안 하겠습니까. 김구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면 평양 거리에 ‘김구를 타도하라’는 벽보가 나붙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습니까.
이승만이 공화국 건국의 원훈이라는 사실 때문에 대통령 이승만의 동상도 마땅히 광화문에 우뚝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겨레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김동길 /연세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