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대통령이 폭격을 명령하였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 
     
      결정적 찬스를 맞아 결정적 실책. 
    趙甲濟   
     
     李明博 대통령은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고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지난 23일 오후 그가 연평도 상공에서 폭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한국 공군 F-15K 등 8대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연평도를 포격하고 있는 북괴군의 해안포대를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더라면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1. 敵의 해안포대는 F-15K가 쏜 고성능 유도 폭탄에 의하여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2. 대기중인 敵의 미그 23기가 대항하였더라면 압도적으로 우세한 F-15K에 의하여 차단되거나 격추되었을 것이다. 1981년에 시리아의 미그 23 등과 이스라엘의 F-15 등이 베카 계곡 상공에서 격돌한 적이 있었다. 시리아는 85대가 격추되었다. 이스라엘은 한 대만 격추되었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3. 공중전은 우리가 바라는 형태의 전투이다. 더구나 북괴군의 해안포대를 공격하는 主임무는 한국의 전투기에 맡겨져 있다. 북괴군의 해안포 공격에 우리가 해안포로 반격하는 것은 지는 게임이다. 북괴의 해안포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반드시 한국의 공군력이 투입되어야 이긴다. 그러나, 李 대통령은 최신예 공군기에 폭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4. 민간인들까지 공격한 북괴군의 전쟁범죄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전투기로 응징하는 것은 법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너무나 당연하다. 더구나 한국 전투기는 우수한 레이더와 무기성능 덕분에 NLL을 넘을 필요도 없이 우리 영공 위에서 쏠 수 있다.
     5. 북괴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는 반격이나 擴戰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공중戰力에선 자신들이 너무나 열세임을 잘 알고 있다.
     6.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韓美연합사는 북괴에 대하여 "만약 추가 도발하면 압도적인 火力으로 응징한다"는 원칙을 천명한다. 이때 미국의 항공모함을 불러들인다. 敵의 국지적 도발은 韓美연합사 체제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전쟁은 홧김에 하는 것이 아니다.
     7. 천안함 폭침으로 사기가 떨어졌던 한국군과 국민들은 '압도적인 勝戰'에 용기를 회복하고 李明博 대통령의 영도력을 칭찬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전환은 남북관계를 한국이 주도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을 것이다.
     8. 압도적 勝戰은 북한정권 지도부의 기를 꺾고, 3대 세습도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찬스를 놓친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이렇게 몰리고 있다.
     
     1. 전투기에 폭격명령을 내리지 않은 그의 나약함에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2. 한국군이 응징을 하지 못한 데 대하여 비판여론이 거세지고 국방장관이 옷을 벗었다. 그만큼 軍의 사기가 약해졌다.
     3. 연평도 주민들이 섬을 비우고 육지로 탈출함으로써 서해5도로부터 후퇴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확산시키고 있다.
     4. 대통령과 軍지휘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퍼지고 있어 향후 안보전략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공포증이 확산되면 북한정권은 이를 노리고 추가적 도발을 해올 것이다.
     
     5. 이렇게 나약한 정부라면, 서해 5도 방어를 포기, 수도권의 생명줄인 NLL을 넘겨줌음으로써, 조국의 안전에 치명적인 구멍을 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생긴다.
     6. 대통령과 軍 지휘부가 용기가 있었다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局地도발인데, 미국의 도움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敵을 타격할 수 있는 충분한 무기를 갖고도 용기가 없어 쓰지 않은 정부가 미국더라 대신 싸워달라고 부탁하는 형국이다.  
     
     李明博 대통령이 그 결정적 순간에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면 救國의 영웅이 되었을터인데 비겁을 선택, 크나큰 국가적, 개인적 위기를 불렀다. 1936년 3월 프랑스의 국가지도부가 히틀러의 나치독일군대가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로 불법진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막지 않아, 2차 대전으로 가는 길을 열고 결국 프랑스가 독일군에 항복하는 사태까지 생기게 된 과정과 비슷하다.

    후일 역사가들이 연평도 도발을 '李明博의 라인란트'였다고 기록하게 된다면 이는 대한민국이 赤化된 다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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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인란트 재무장과 프랑스 지도부의 無力
     (배진영)
     
     
     1936년 3월7일 새벽, 나치 독일軍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非무장지대로 규정되었던 라인란트로 步武(보무)도 당당히 進駐(진주)해 들어갔다.
      사실 라인란트 진주는 독일 軍部로서는 살떨리는 모험이었다. 1년 전 3월16일 독일은 再군비를 선언하긴 했지만, 아직 프랑스 등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만한 변변한 戰力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무렵 프랑스軍은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독일軍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무시하고 라인란트로 진주할 경우 이를 응징할 수 있는 국제법적 권리를 갖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평화를 갈망한다』-
     
      이 때문에 독일 국방장관 블롬베르크 元帥는 독일군에게 라인란트 진주를 명령하면서도 프랑스軍이 반격을 가할 경우에 대비한 腹案(복안)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36계 줄행랑이었다. 사실 라인란트에 투입한 실병력이래야 고작 3개 大隊에 불과한 현실에서 독일군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알고 있었다.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영국이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1935년 3월10일 독일이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보유가 금지되어 있는 공군을 보유하고 있음을 공표했을 때에도, 같은 해 3월16일 再군비를 선언했을 때에도 그들은 국제연맹 이사회를 통한 유감표시 이외에는 어떠한 실질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5월21일 히틀러가 내놓은 평화제안에 기대를 걸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날 히틀러는 『나치 독일은 평화를 갈망한다』면서 알자스-로렌 및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영유권 주장 포기, 로카르노 조약의 준수, 라인란트의 非무장화 준수, 중포·重전차·각종 군함 등 침략병기의 폐기를 위한 협상 등을 제안하였다. 특히 영국에 대해서는 독일 해군력을 영국 해군력의 35% 이내로 제한하는 내용의 英·獨 해군협정을 제안했다.
      히틀러의 평화제안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한 부당한 제약들을 해제하고 독일을 국제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복귀시켜 주기만 하면 독일은 유럽의 평화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가득했다.
      유럽은 히틀러의 이러한 제안에 매료되었다. 영국 런던 타임즈紙는 『히틀러의 연설은 타당하였고 솔직하였으며 앞뒤가 잘 맞는 것』이라면서 『이 연설이 어느 곳에서나 진지하고 정확하게 깊이 생각한 끝에 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고 극찬했다.
      영국은 바다에서의 영국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英·獨 해군 협정에 진지한 관심을 표시하면서 독일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동맹국인 프랑스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1936년 3월 7일 독일軍의 라인란트 진주는 히틀러 자신이 내놓았던 위의 평화제안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추가적인 도발에 대비하는 의미에서 13개 사단을 독일과의 국경지대로 증파하는 한편, 외무장관 에티앤느 플란당을 영국으로 보내 독일軍을 라인란트에서 몰아내기 위한 공동 작전을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요컨대 라인란트가 프랑스 땅은 아니지 않습니까? 독일은 그동안 비워놓았던 자기네 집의 빈 방 하나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한 것 뿐입니다』
      영국 外相 안소니 이든은 하원에서 『독일군의 라인란트 점령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중대한 타격을 가한 것이지만, 우리는 독일의 행동이 전쟁을 야기할 위험을 내포한다고 추정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軍 작전참모부장을 역임한 알프레드 요들 大將은 후일 뉘른베르크 戰犯(전범) 재판에서 『당시 우리들의 실정으로 보아 국경에 증파되었던 프랑스군 부대는 능히 우리들을 분쇄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히틀러 역시 『라인란트에 진주한 후 48시간 동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신경이 곤두섰던 시간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긴장된 시간을 히틀러는 「강한 의지력과 놀라울 정도로 태연자약했던 태도」로 견뎌냈다.
     
      - 독재자를 타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다 -
     
      『라인란트 점령은 군사작전으로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럽에 커다란 새로운 전망을 열어 놓았으며, 라인江의 다리를 건너 3개 大隊가 진주한 것으로 유럽의 전략 정세가 뒤흔들렸을 뿐 아니라, 다시는 회복시킬 수 없을 만큼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히틀러(그리고 영국에서는 처칠)뿐이었던 것 같다.…1936년 3월 서구의 두 민주주의 국가는 중대한 전쟁의 위험없이 군국주의화한 침략적인 전체주의 독일의 대두를 막고 나치스 독재자와 그 제도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가졌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윌리엄 L. 샤이러, 「제3제국의 흥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