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해부대가 한국군 사상 최초로 해외인질구출작전에 성공하면서 소말리아 해적 소탕작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군이 소말리아 해적과 대적해 승리한 것이 두 번째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1994년 이탈리아 전투부대 지킨 한국 건설공병대
소말리아 해적은 1991년 내전 때 활동하기 시작한 군벌 민병대의 또 다른 모습이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소말리아는 1969년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22년 간 독재정권이 유지됐다. 1991년 이에 불만을 품은 군벌 아이디드가 내전을 시작하면서 무정부 상태가 시작됐다.
당시 내전으로 군벌의 민병대들이 민간인을 학살하자 국제평화유지군이 소말리아에 파병되었다. 이때 우리 군도 동참했다. 당시 우리 군은 1993년 7월 건설공병대대를 파병했다. 파병된 부대는 공병장비 외에 81mm 박격포와 같은 중대지원화기 정도만 보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국 공병대대의 안전을 걱정한 국제평화유지군은 이탈리아 보병대대 진지 내에 주둔하도록 배려했다.
얼마 뒤 소말리아 군벌의 습격이 있었다. 우리 공병대대를 지킬 것이라던 이탈리아 보병대대는 기습공격에 대피해버렸다. 이에 우리 공병대대는 81mm 박격포 등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결국 소말리아 군벌 민병대는 우리 공병대대의 정확하면서도 강력한 반격에 후퇴했다. 이후 평화유지군 사이에서는 ‘한국군은 공병대도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났다. 우리 공병대대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1994년 3월 철수했다.
2011년 청해부대의 구출작전
그 후 10년 넘게 소말리아는 우리 기억에서 멀어져 있었다. 2007년 원양어선 마부노 1~2호가 해적에 피랍되면서부터 소말리아라는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1993년 공병대대를 괴롭히던 군벌과 민병대들은 이제 ‘해적’으로 직업을 바꿨다. 이들은 ‘생계’를 핑계로 자국 연안을 지나가는 배를 공격해 돈을 뺏었다. 여기에 우리나라 어선이 걸려든 것이다.
이후 최근까지 우리나라 선박 10여 척이 해적들에게 피랍됐다. 피랍된 선박들은 모두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인질생활을 한 선원들은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일부 선원들은 지금까지도 정상적인 생활도 못할 만큼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지난 정권 시절 정부는 ‘군사작전은 어렵고 위험한데다 자칫 인질의 목숨을 앗을 수 있다’면서도 ‘정부는 해적과 직접 협상할 수 없다’는 모토를 내걸며 선주(船主)와 해적 간의 협상을 도와줄 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7년 마부노 1, 2호 피랍 당시 대선후보로는 유일하게 피랍선원 가족들을 만나 격려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가족들에게 ‘제가 대통령이 되면 재외국민보호에 힘 쓰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실제 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해적들에게 우리 상선이 피랍되는 상황을 막아보고자 2009년 3월 청해부대를 창설해 아덴만으로 파병했다. 청해부대는 이 지역을 지나는 상선들을 보호했지만 구축함 1척으로는 인도양까지도 그 활동범위를 넓혀가는 해적들로부터 우리 상선 전체를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북한과 대치중인 상황에서 해군력 전체를 소말리아로 파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2010년에 들어서도 삼호드림호(4월), 금미 305호(10월) 등이 해적들에게 피랍됐다.
2010년 11월 삼호드림호가 217일 만에 풀려나면서 105억 원이 넘는 몸값을 지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국격을 높인다면서, 우리나라가 이제는 선진국에 근접할 만큼 국력이 강해졌다면서 왜 러시아나 프랑스처럼 해적들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하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온 지 두 달 만에 또 다시 우리 화물선이 피랍 당하자 정부도 이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군 지휘부는 청해부대를 긴급 출동시키는 동시에 작전에 돌입했다. 청해부대는 작전을 계획한 지 6일 만인 21일, 강대국 대테러 부대도 어렵다는 해상인질구출작전을 보기 좋게 성공시켰다. 물론 해적들은 모두 소탕됐다.
동일인은 아니지만 같은 뿌리, 민병대와 해적
물론 우리 군과 대적한 소말리아 민병대와 이번에 소탕된 해적은 동일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 뿌리는 같다. 즉 우리 군은 1994년 건설공병대대가 민병대의 기습공격을 물리친 것에 이어 2011년 두 번째 대결에서도 승리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