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국체험 100년 특별연재]
     
    한일 군사 협력 원하거든 과거 청산 극복이 먼저다.
    - 관동대진재와 조선인학살
     
    許文道 전 통일부 장관 asadalmd@hanmail.net
     
    오부치(小淵) 수상은 갔지만 《오부치 리포트》는 남았다고 할 만하다. 보고서의 제목은 《21세기 일본의 구상》, 오부치 총리 직속으로 각 분야의 정수분자급 유식자 50여 명을 모아, 1999년 10개월에 걸친 집중토론의 결과로 만들어졌다. 주요논점을 정리하고 토론할 때에는, 총리를 포함한 50여 명 전원이 한솥밥을 먹으며 합숙을 했다 한다.
    보고서는 20세기 말 일본의 도달점을 냉엄하게 관찰하고 있지만, 21세기의 일본은 이래야 한다고, ‘희망과 각오’를 표명하고 있다. 문제제기가 있고, 이념제시와 정책제언이 있다. 한국 쪽에서도 참고할 것이 많아 보인다.
    지난 1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국방장관 회담에서 양국의 군사협력 강화문제가 등장했다. 한일강제합방 100년을 넘기는 시점에, 군사협력문제를 앞에 하니 감회가 없을 수 없다. 100년 전에 일본은 조선에 군대 깔아, 제정신 가진 조선사람들(의병)은 모조리 도륙해 놓고, 나라 뺏는 문서에 도장 받아내어, 합법행위라며 조선땅을 삼켰던 것 아닌가.

    한일, 생사 같이할 마음밭 있나?

    더 나가지 않겠다. 중국이 G2가 되고 보니 동아시아에 평화구조를 만들어내야 할 현실의 필요성이 한-일-중 삼국 앞에, 세계 앞에 닥쳐와 있다. 한일 군사협력은 한다 하면 군수(軍需)나 정보차원에서 끝날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의 미국의 세계전략이 한․미․일 동맹의 일체화를 빼놓을 수 없겠기에, 한일군사협력을 한다 하면 그 종착점은 한일동맹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맹이란 두 나라 국민이 생사를 걸어야 할 위험 앞에 함께 서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 양 국민 간에는 생사를 함께 할 마음밭이 양성(釀成)되어 있다는 것인가.
    마음밭의 준비 없이 군사협력 운운하는 것은, 그동안의 한일관계를 봐서도 알겠지만,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문제를 더욱 어지럽게 할 뿐일 것이다.

    미국 측 당국자들은 문제접근의 수순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2월 한국과 일본을 방문했던 마이클 멀린 미국 합참의장은 ‘한국과 일본, 미국이 합동훈련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면서, ‘한일 양국은 과거의 역사를 극복해 안보협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다.(중앙일보, 2011년 1월 5일)
    미국의 최고위 군인인 멀린 합참의장은 정확하게도 한일군사협력의 전제가 양국의 과거극복과 역사 청산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일 간에 미진했던 과거나 역사문제를 얘기하면, 코앞이 급한 정치가들은 누구는 과거만 붙들고 사는 양, ‘미래지향’ 운운하며 언설의 고지를 차지하려고만 들었던 것을 상기한다.

    앞에서 본 오부치 리포트 《21세기 일본의 구상》에는 그동안 일본 관변사이드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과거에서 미래를 변증하는 철학이 당당히 개진되어 있다.
    “미래가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과거와 현재의 제약 없이 미래를 자유롭게 쌓아올린다고 말하는 것은 불성실하고, 자타 쌍방을 속이는 결과로 되기 쉽다. 과거를 실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기들이 무엇이었던지를 과거의 현실 속에서 확인하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이 글은 위에서 든 《21세기 일본의 구상》 철학에 입각하여 한일 간의 마음밭에 꽂힌 굵은 가시 하나를 뽑아내어, 군사협력 나아가서는 동맹까지도 떠받칠 수 있는 마음밭을 정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수현의 <헌신>과 <학살>의 추억

    올해도 고(故) 이수현씨의 추모행사가 일본에서 1월 26일 있었다. 그는 10년 전 이날 도쿄(東京)의 한 환상선(環狀線) 전철역에서, 열차가 진입 중인데, 선로에 사람이 떨어진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올해는 10주기라고 한일 양국의 정상(頂上)들이 사람을 통해 추모사를 보냈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고귀한 인명을 구하려는 고인(故人)의 용기 앞에서 국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했고, 간 나오토(菅直人) 수상은 “일본 국민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고인의 용기 있는 행동을 잊지 않았다”고 했다.

    ‘의인(義人)’ 이수현이 선로로 뛰어들던 그 순간 그의 상념 속에 ‘용기’나 ‘국경’이나 ‘국적’ 같은 것이 스쳤을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의 행동은 ‘용기’쯤은 뛰어넘어 ‘인간의 본성이 원래 착한 것’이라 하는 성선설(性善說)의 설명에 곧잘 쓰이는 비유 ‘사람은 누구나 다 남의 불행을 차마 보고 있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 들어간다고 할 때, 이를 보는 사람은 모두 누구나 아이를 구하려 한다’와 같은 수준이다.
    특이한 것은, 선로로 뛰어들 그때가 오후 7시16분으로, 귀가시간이라 다수의 일본 학생, 직장인들이 지켜보는 속이었고, 행동한 것은 일본에 온 지 반년 남짓한 한국 젊은이였다는 사실이다.

    ‘망국체험 100년’을 돌이켜보는 눈에는, 도쿄 한복판에서 있었던 한국 젊은이에 의한 성선(性善)의 이 극한 사례(事例)는, 역시 도쿄 천지에서 약 80년 전에 있었던 일본인들에 의한 성악(性惡)의 역사적 극한 사례(史例)를 상기시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그것은 1923년 9월 1일의 일본 관동(關東)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사건이다.

    이 사건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는 성악설을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대사건이다.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지대 일원에 강도 7.9의 강진이 덮쳐, 전 도쿄시가의 절반이 완전 불바다가 되자, 일본당국은 군사 계엄령을 폈다. 군대와 경찰이 앞장서 치안유지 명목으로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의 전모를,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밀고 속이 메스꺼워 여기에 그려낼 신경은 내게 없다.

    짚고 넘어갈 것은, 평소에 선량했을 것에 틀림없는 평범한 일본의 생활인들, 상점주인, 동네반장, 자원 불 끄기 대원, 재향군인, 마을 축제라면 나서는 청년단원, 이런 사람들이, 일본의 관변당국에서 퍼뜨린 유언비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불질렀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확인도 없이 믿어버리고는, 자경단(自警團)이라고 골목마다 거리마다 떼지어 몰려서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하여, 조선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일본말을 몇 마디 시켜보고는, 서툴면 조선인으로 판정하여, 사정없이 즉석에서 참살하였다는 사실이다.

    낫 같은 것이 장대 끝에 달린 소방용구, 죽창, 몽둥이, 일본도, 엽총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이라는 민간인들이 둘러서서는 찌르고, 내리치고, 두들기기를 짐승 잡듯 했다고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치를 떨고 있다. 더러는 반죽음한 사람을 여럿이서 사지를 붙들고 활활 타는 모닥불에 시커멓게 태우고 그슬러 시궁창에 던지고, 숨 끊어지지 않은 사람을 생매장하기도 했다 한다.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에 이렇게 학살된 대일본제국의 국민이기도 했던 조선사람의 숫자는 6600여 명으로 조사되어 있다.(이상 참고, ① 姜德相, 《關東大震災》, 中公新書 ② 北澤文武, 《大正の朝鮮人虐殺事件》, 鳩の森書房 ③ 今井淸一編著, 《日本の百年  震災にゆらぐ》, ちくま學藝文庫 ④ 《現代史資料(6) 關東大震災と朝鮮人》 みすず書房)
     
    가해자의 트라우마
     
    일본의 서민들이 ‘약간 경박한 채로, 바지런하고 선량하다’는 것은 전전(戰前)에 같이 살아본 조선사람들이 흔히 하는 얘기였다. 이런 사람들이 조선사람들도 같이 당한 대진재(大震災) 앞에서 관변의 유언비어 한마디에 악귀보다 더한 마성(魔性)을 분출해 낸 것이다. ‘선량한 범인들’ 속에서 단시간에 터져나온 이 잔혹한 마성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성악설(性惡說)을 믿게 하고도 남는다.
    아니라면 일본인이란 원래 조선인 앞에서는 악귀로서 만들어진 사람들이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본인들이, 조선의 농토에서 밀려나, 같은 국민이라니까 일본으로 밀려와 엿장수나 날품팔이 등으로 바닥인생을 사는 조선사람들을, 무슨 데모를 한 것도 아니고, 달려들어 저항을 한 것도 아니고, 죄지은 것도 아니고, 그저 단지 조선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선사람을 무참하게 잔혹하게 일본의 범인들이 살육한 것이다.

    ‘대일본제국’이 1894년 청일전쟁으로부터 1945년 해방까지 50년 사이에 한국민족에 저지른 3대 악행을 순서대로 든다면,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진두지휘한 명성황후 살해, 제암리교회 방화학살과 유관순 옥살(獄殺) 등 3ㆍ1운동 탄압, 그리고 관동대진재의 조선인 학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제국 일본의 악행 제1호는 단연코 ‘관동대학살’이다. 당시의 계엄령은 쇼와(昭和)천황 히로히토(裕仁)가 섭정이었을 때 특별재가(裁可)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의 권력장치는 민간인들을 유도하여, 도쿄 중심으로 조선민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감행해 들어갔던 것이다.

    이 일이 국제여론에 부딪히자, 제국정부는 즉각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정부는 성과(?)가 현저했던 몇몇 자경단을 검거하여 재판에 넘김으로써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려 했다. 그러고는 사건의 은폐공작에 손을 썼다. 이 때문인지 제국일본의 최대의 악행인 ‘관동학살’이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빠져 있는 것을 의아해하는 역사학자들이 있다.(山田昭次, 高崎宗司, 鄭章淵, 趙景達, 《日本と朝鮮》, 東京書籍)

    떠올리기조차 싫은 얘기를 필요해서 개략만 그리는 데도 길어졌다. 하산(下山), 쇠퇴를 개시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문명의 재반등점을 밉든 곱든 순망치한(脣亡齒寒), 이빨 시린 이웃은 되기 싫어, 한번 찾아보자 하니 좀 함께해 주기 바란다.
    어쨌건 단위 높은 악행은 피해자보다도 가해자 쪽의 정신에 예사로는 극복키 어려운 트라우마(심적 상흔·傷痕)를 남기는 것 같다.

    도쿄대학 법학부와 《아사히(朝日)신문》 정치부를 거친 한 저널리스트(후카쓰 마스미·深津眞澄)는 관동대지진을 앞에 하여 일본의 보통사람들 속에서 터져나온 악마적 잔학성의 역사심리적 연유를 다음과 같이 통찰해 보이고 있다.
    “민비 암살 후의 초기 의병투쟁은 두고라도, 일․러전쟁 이후의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한 현지 민중의 격렬한 저항(필자주․ 주로 군대 해산 이후의 의병투쟁) 모습은 일본 국내에 알게 모르게 전해진 것 같다. 그리된 사정은, 조선 주류(駐留)의 사단(師團)은 (일본) 내지(內地)로부터 2년 교대로 파견되고 있었으므로, 의병투쟁이나 3ㆍ1운동에 대한 가혹한 무력탄압의 실태는 (제국정부가) 신문보도를 제한했어도, (귀환)병사의 입을 통해 (일본)국내에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 다카미 준이 말하고 있는 ‘일종의 죄악감, 언젠가는 복수 당하는 공포’는 많은 (일본)국민의 마음 바닥에 서려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일본군 병사의 트라우마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정책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것은 대진재를 계기로 씻으려야 씻을 수 없는 오점을 역사에 남긴 것이다.”(《近代日本の分岐点》, ロゴス)
     
    “조센진이 쳐들어온다!”
     
    위의 인용에 나오는 작가 다카미 준(1907~65년)은 시, 평론에 걸쳐서도 활동한 쇼와 문단의 거목이었다. 제국시대 일본 최고의 엘리트코스였던 일중(一中), 일고(一高), 도쿄제대를 거친 다카미(高見順)는 스스로가 사생아(私生兒)임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의 수재경력은 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는 편모의 엄격한 훈도에 떠받쳐진 것이었으나, 그의 감성은 제국주의의 풍정(風情)하고는 거리가 있었고, 여리면서 날카롭고 해맑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대일본제국은 패망했는데 일본사람 모두가 해방감을 느꼈다는 1946년, 갓마흔의 다카미는 자전적(自傳的) 소설 《내 가슴의 밑바닥 여기에는》을 발표했다. 다카미는 16세 때 지금 한국대사관이 있는 도쿄 아자부(麻布)에서 이 지진을 겪었다. 소설 속에는 진재 이틀째 저녁의 체험을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소설의 이 대목은 다큐멘터리라 해야 할 만큼, 참으로 귀중한 일본인 손에 의한 학살 관련 기록이다. 일본 민간인 손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도쿄의 풍경이 가감 없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가 자국민의 가슴 속에 남긴 트라우마·대 조선인 죄악감을 예리하게 도려놓고 있다.

    이때에 학살된 다수의 조선사람은 주검조차 남기지 못했고, 이름도 남기지 못했고, 조선 고향으로 소식도 날리지 못했다. 조선사람을 제국 일본이 국민이라 했는데도, 일본정부는 장례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땅에서 한도 못 남기고 극한의 고통 속에 스러져간 조선사람들에게 다카미 소설의 이 대목은 더 할 수 없는 진혼곡일 수 있다 싶어, 좀 길어도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소문이라고만 해치울 수가 없는 유언비어가 연달아서,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잊기 어려운 것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데마였다.
    ‘어젯밤, 한창 불났을 때 쾅, 쾅쾅 하는 소리가 멀리서 울렸죠. 그건 죠센진(朝鮮人)이 화약고에 불을 붙여 폭발시킨 것이라 해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다 태울 듯하던 그 화재는, 무너져내린 집에서 불이 나 점점 번져나간 것뿐만 아니고, 조선인이 시내 여기저기에 불을 지르며 돌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과연 그렇군이라며, 듣는 자들 중에는 곧장 맞장구를 치는 자도 생겨나서
    ‘그렇지요, 아니라면 그렇게 큰불이 될 리가 없어,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어요.’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는 좋았는데,
    ‘큰일났다, 큰일났다! 조센진(朝鮮人)이 쳐들어온다!’
    총기 탄약을 가진 조센진 한 떼가 아니 대군(大軍)이 메구로(目黑·앞에서 나온 아자부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의 거리) 방면에 나타났다 한다. 도쿄 중심을 향해 대거 진격 중으로, 일본인을 보기만 하면 남녀 가리지 않고, 어린애든지 뭐든지 닥치는 대로 학살한다니!
    어 큰일이다며, 멀쩡한 사내도 새파래졌다. 습격자들이 어디를 어떻게 지나서 도심으로 나갈지, 그것이 전혀 예측이 안되니 도망을 빼려야 뺄 수가 없다. (지진의) 쓰나미라도 왔다면야 높은 언덕으로라도 도망칠 방도라도 있겠으나, 어디에 불쑥 나타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벽장 속에라도 숨어서, 꾹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딴 수가 없다. 이리하여,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집으로 보이게 하여, 습격자를 지나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 어제와 마찬가지로 집 밖에 나와 있던 근처의 사람들이 홀연히 집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해서 거리 전체가 금세 괴괴해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몇십 분간인가, 거리 자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은 그 섬뜩한 침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침묵은 ‘조센진’ 내습 따위 있을 수 없는 데마에 대해 누구 하나 반박 발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조센진 폭동설’은 누가 만들었을까
     
    방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엎드려 있으면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의 조선사람의 모습을 떠올려서는, 그렇게도 사람 좋을 것 같은 사람들도 이 폭동에 가담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수상쩍게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만일에라도 이 폭동을 그 사람들의 울적한 노여움의 폭발이라고 한다면, 너무나도 그것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현미빵 따끈따끈…’
    나무상자를 내 학교 책가방처럼 어깨에 걸치고, 빵을 팔러 다니는 다리 저는 조선 노인은
    ‘요보, 요보’라고 애들이 욕을 해대면, 구멍투성이의 휑뎅그렁하게 넓은 얼굴에 울며 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서는
    ‘요보의 빵 맛있다오, 빵 사주.’
    ‘맛텡이 없어, 드러운 걸.’
    아이들 중에는 잔돌을 주워 던지는 자도 있었다.
    ‘야, 이 다리 저는 영감아 분하거든 달려들어 봐 야 -, 야.”
    현미빵 파는 노인은 그래도 노여움을 참고서
    ‘나이 많은 사람 놀리는 것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면서 다리를 절며 절며 멀어져가는 것이었다. 어딘가의 함바(주? 요새 신문에 나는 것의 원조 함바)에서 다쳐가지고는 토목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겠지.
    내가 잘 알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조선사람은, 이 사람도 역시 집 근처를 떠돌고 있는 물건팔이이지만, 이 사람은 아직 젊은 사내로서, 헝겊을 붙인 것이긴 해도 지붕을 번듯하게 인, 임시극장의 파수막 같은 것을, - 어째서 그런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속에 홀랑 들어가서 운반하면서(집 통째로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는 그 모양새가 사람 눈을 끌었다. 사람 눈 끌기 위한 궁리일까.)
    ‘엿이요, 엿 조선 엿.’
    특유의 악센트로 아이들에게 외쳐 대면서, 엿을 자르는 망치를 땅땅거리고 울려 대었다. 엿이 맛있는지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앞의 영감님처럼 놀림 받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아이들에 웃어 마치는 그 미소는 무척이나 쓸쓸한 것이었다.
    통학하는 길에 때때로 눈에 뜨이는 조선사람 토목 인부들도 나는 떠올렸다. 그 어두운 인상을 나는 뜨내기 떠돌이의 적적함과 괴로움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었지만서도, 생각건대 그것은, 그들을 그 같은 신세 지경으로 몰아넣은 일본사람에 대해 억누르고 억누른 분노가, 그늘에 들어찬, 슬피 안으로 안으로 곱쳐 든 어둠이었는지도 모른다. …

    ‘…?’ 유달리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왔다…?’
    귀를 기울였더니, 그것은 오토바이의 그 탕탕탕 … 하는 소리였다. 한 대뿐의 소리로서, 그 소리 이외의 소리가 없는 것은 이상했지만, 척후였을까고도 생각되었다.
    불안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은 이윽고 앞쪽의 전차거리를 전속력으로 지나가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심야와도 같은 정적이 왔다.

    데마로 판명난 것은 얼마나 지나고 나서였을까,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판명이라고 해봤자 그건 ‘메구로(目黑) 방면으로부터의 대거 내습’이 데마였다는 것일 뿐, ‘조센진’ 폭동설이라는 것이 애당초 뿌리도 이파리도 없는 허무맹랑한 데마로 판명된 것은 아니었다.
    이 조센진 폭동이란 데마는 도대체 누가 말을 끄집어낸 것일까, 어떤 곳에서부터 발생한 것인가, 어느 것도 확실한 증거는 없이 의문인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 같은 데마가 당시 확실하게 사실로서 믿어지고 순식간에 사실로서 유포된 것은, …진재(震災)로 인심이 산란해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면 그건 끌어다 붙인 이유라는 느낌을 면할 수 없고, 근본은 조선에 대해 일본인 전체가 느끼고 있는 일종의 죄악감,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

    언젠가는 조선인한테 복수 당하는 것 아닐까라는 공포, 그것이 그 같은 데마를 낳게 한 밑바탕이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기다가 이 공포가 낳은 조센진 내습 데마에, 이번엔 또 스스로가 불끈하고 터져올라, 결국은 조선인 학살이라는 눈 뒤집힌 (광란의) 행동으로 나왔다.
    조선사람으로 보았다면, 싫다 좋다 없이 우격다짐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나부리 고로시’(嬲殺, 주․당장 죽이지 않고 갖은 고통을 주어 단말마의 고통 속에 죽임)로 하는 극악무도의 잔악행을 도쿄 전시(全市)에 걸쳐 저지른 듯하지만, 우리 집 근처에는 그 같은 폭민(暴民)의 사설검문소라 하는 것이, 산노하시(三の橋․지금 민단 중앙본부서 걸어서 5분거리) 다리 곁에, 누가 말을 끄집어낼 것도 없이 만들어놓고는, 이 녀석 냄새 난다고 보인 통행인은 닥치는 대로 낚아채어
    ‘어이, ガギグゲゴ(탁음 가기구게고)라고 말해 봐.’
    혹은 (탁음의) ‘주가쓰 주고니치’(十月十五日)를 빠른 말씨로 해보라고 다잡는다. 탁음이 술술 못 나오면, 거봐라 조센진이다라고 간주해 버린 것 같다.
    ‘…인 것 같다’라 한 것은 나는 그 장에 입회하지 않았던 때문인데, …”(《高見順 전집 第三》, 勁草書房刊에서, 필자譯出)”
     
    학살의 원흉은 두 명의 내무대신
     
    다카미 준(高見順)의 위 인용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들겠다.
    첫째는 도쿄 전 시에 걸쳐 일본 민간인이 떼지어 길을 막고서 조선인으로 보았으면 ‘나부리 고로시’로 죽였음을 제2차대전 직후 시점에서 기록했다는 것이다.
    ‘나부리 고로시’, 인용 속의 주에서 의미는 알게 했지만, 한자로 된 말이라도 한국말에는 없다. 권위 있는 일본어사전인 이와나미(岩波)사의 고지엔(廣辭苑)을 그대로 옮기면 ‘곧바로 죽이지 않고, 고통을 주어, 희롱하여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몇 가지 자료에 실상이 그려져 있지만 여기 옮기기엔 역겹다.
    제국일본의 수도의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이 유언비어에 격발되어 그들의 생활공간에서 인종청소의 기세로 조선인을 ‘나부리 고로시’로 학살했던 것이다.
    유언비어의 출처가 드러나면 이는 ‘나부리 고로시’와 함께 일본인들의 역사적 악행의 세계사적 등급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히틀러의 권력장치에 의해, 은밀하게 진행되고 순식간에 죽게 한 아우슈비츠보다 더 악질적이다.

    다카미 준의 인용에서 둘째로 관심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유언비어의 발생처와 전파경위를 의아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전적 서술이므로 당시 16세의 다카미 준이 갑자기 출처를 짚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무렵 한창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챔피언적 양심이었던 도다이(東大)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년)는 9월의 학살 2달 뒤인 11월의 《추오코론》(中央公論)에 ‘책임있는 XX가 이 유언(流言)을 전파하여, 이를 믿게 하는 데 힘이 되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위의 ‘XX’는 당시의 검열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 제국시대 쇼와기의 역사비리를 파헤쳐 선풍적 인기 속에 문호 소리를 들었던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는 이 ‘XX’에 정부, 경찰, 군부 등의 자구(字句)를 넣으면 된다고 했다. 즉 정부 쪽의 관헌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거기서 나아가 마쓰모토(松本)는 “이 데마의 근원은 정부가 의식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구석이 있다”고 했다. 연이어서 유언비어의 근원을 진재 때의 두 사람의 내무(內務)대신으로 지목하는 설을 확신 조로 들어 놓았다.( 松本淸張, 《昭和史發掘 1》, 文春文庫)

    한 사람의 내상(內相)은 3ㆍ1운동 직후에 사이토(齊藤) 총독과 함께 조선에 왔던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 미즈노(水野鍊太郞), 또 한 사람은 대만 총독부의 2인자, 민정(民政)장관을 ‘하고 있을 때 대만사람들을 몇천 명이나 죽인’ 고토(後藤新平)였다. 이들은 모두 5년 전인 1918년의 일본민중의 쌀폭동을 각료로서 체험하였다.
    제국일본의 내정(內政)의 우두머리를 데마의 원천으로 보는 설(說)은 이렇다.

    “조선인 학살을 부추겨 일으킨 것은 식량폭동(주․지진으로 도쿄의 절반이 불타, 전 시가의 교통, 통신, 전기가 단절되어 시민의 식량접근이 일조에 불가능해졌기에)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민족증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정부로 향하는 민중의 반항을 조선인으로 향하게 했을 터이다.”(‘朴烈大逆事件’, 《昭和史發掘 1》)
     
    토인비의 심판
     
    다카미 준은 위의 인용에서 세 번째로 일본인의 내면의 죄악감을 부각시켜 놓았는데 특별히 주목하고자 한다.
    다카미는 당시의 지진 재해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방화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일본인들에 의해 사실로 믿어지고, 순식간에 유포된 것은, ‘조선에 대해 일본인 전체가 느끼는 일종의 죄악감’이 근본원인이라 하였다. 그 유언비어에 격발되어 조선인 학살은 자행되었으니까, 다카미가 위와 같이 썼던 제2차대전 직후의 시점에서는 일본인의 대(對)조선인 죄악감은 더욱 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악감이나 죄의식을 오래 의식 속에 안고 살 수는 없으므로 의식 밑으로 눌러버리거나, 진실을 왜곡하여 죄악감 자체를 거부하려 든다. 이렇게 한다고 죄악감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고등종교나 정신분석이 죄의식으로부터의 인격의 자유를 위해서 제시해 주는 것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진실에 입각한 사죄나 혹은 참회뿐이다.

    무의식의 심연으로 눌러버리면, 죄는 의식의 표면에서 사라지지만, 죄의식이 그 인간을 떠나간 것은 아니고, 장기화되면, 눌러놨던 죄악감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 고개를 내밀게 된다. 이 불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하나의 인격이 튼실한 아이덴티티(자기동일성)를 확립하기는 어렵고, 동시에 그 같은 사회에서는 약체(弱體) 리더십 말고는 출현하기 힘들다는 것을 정신분석론은 말해 주고 있다.
    약체 리더십이 일상화되어 한 사회가 자기결정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면, 그 문명은 쇠퇴기를 맞이한다고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 토인비는 지적하고 있다.

    토인비는 한 문명이 한 문명을 침략하여, 이에 성공한 인간들이 보이는 심리경향을 ‘인간성 부정’이란 항목으로 서술하고 있다.(《역사의 연구》 제33장 ‘동시대 문명 조우의 결과’)
    잠시 토인비를 따라가 본다.
    다른 문명의 침략에 성공한 문명을 대표하는 인간들은,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을 신(神)에 감사하는, 바리새 인(人)의 오만에 빠지는 경향이 강하다.’ 지배자들은 정복된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싸움에 져 꼬리 내린 개’로 내려다보기 쉬운데, 결국 ‘이긴 개’와 같은 짓을 하여 개(犬)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인간의 혼은 모두 창조자인 신의 눈으로 보면 평등한 것이므로 동류(同類)인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뺏으려는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유일한 결과는, 그 자신의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토인비는 악질적인 인간성 부정의 하나로 승자가 패자를 ‘원주민’이라면서 동식물처럼 가처분(可處分) 대상으로 해버린 경우를 들고 있다.
    토인비는 스스로가 속했던 서구문명이 저지른 죄도 고발하고 있다. ‘근대 후기에 서구사회를 해외에 확대한, 영어를 말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가진 서구인 개척자는, 인간을 ‘원주민’으로 해버린 유목민 제국 건설자의 죄를 저지른 최악의 죄인이었다.’고 했다.
    토인비는 침략자 타락의 극한 형태를 들어놓았다. 이들은 ‘원주민’ 위에다 다시 ‘열등(劣等)인종’의 낙인을 찍음으로써 그 ‘원주민’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주장을 부동의 것으로 하려고 들었다’는 것이다.

    토인비는 승자가 패자에게 찍은 ‘열등인종’ 낙인을 가장 악질적이라면서 세 가지 이유를 대고 있다.
    첫째, 그것은 패자를 신앙이나 문화 등과는 관계없이, 모든 면에서 무가치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처럼 인류를 인종적으로 이분(二分)하는 것은 양자 간에 넘을 수 없는 도랑을 파게 된다.
    셋째, 인종적 낙인은 종교적 낙인과는 달리, 피부색이나 코 모양 따위의, 인간성의 가장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측면을 끄집어내어, 이를 차별의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조센진’, ‘열등인종’
     
    일본에서는 지금 ‘조센진’이라는 말을 신문, 잡지, 방송 등 공적 장에서는 일절 쓰지 않고 있다.
    차별어라고 일본인들 스스로가 제2차대전이 끝난 후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거두어들여 버렸다. ‘차별어’라고 거두었다는 얘기는 그때까지 ‘조센진’을 차별어로 썼다는 얘기다. ‘대일본제국’이 조선반도를 그들의 판도에 집어넣었던 그 시절, 조선사람들이야말로, 토인비가 설파하는 ‘원주민’ 취급과 ‘열등인종’ 취급을 일본인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센진’이란 말에는 침략자에 의한 인간성 부정의 극악 형태인, ‘원주민’과 ‘열등인종’의 낙인을 동시에 찍혀 있었던 것이다. ‘관동대진재’ 때 문제의 유언비어 ‘조센진이 폭동을 일으키고, 불을 질렀단다’의 ‘조센진’은 일본인들이 진작부터 ‘열등인종’과 ‘원주민’의 낙인을 찍어놓고 있었던 말인 것을 어찌 모를 것인가.
    제국일본의 통치당국은 ‘조센진’이란 뇌관을 써서 일본 민중이 때로 모습을 보여주었던 광란의 마성을 정확하게 격발시켰던 것이다.

    토인비의 어법을 빌리면, ‘조센진’ 운운의 유언비어를 유포시킨 일본제국의 관변집단이야말로, 역사상 최악의 범죄집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일본의 통치중추가 수천 년의 이웃문명을 정복하여, ‘원주민’으로 또 ‘열등민족’으로 내려보는 괴이한 철학을 실행해 들어간 결말이, 가장 집중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의 조선인 학살사건이라 할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만일 생각이 있어서, 그들 정신 깊이 박혀 전승될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를 제거하고, 세계 앞에 나설 심리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과거청산을 한다고 한다면, 오늘날도 그 제1호는 당연히 관동대진재의 조선인 학살사건이라야 맞다 할 것이다.
     
    과거청산 없는 국교정상화
     
    1965년의 한일 수교는 과거청산 없는 국교(國交)정상화였다.
    제국일본의 조선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해, 일본 측은 14년간 끈 교섭기간 내내 사죄를 하지 않았다.
    한국 측은 청구권이라 하고, 일측은 경협자금이라 한 무상-유상 8억 달러의 돈을 한국 측이 받아들이기로 함으로써, 양국관계는 문을 열게 되었다.
    수교회담이라는 절호의 찬스에 과거청산을 기피해 버린 후과(後果)는 오늘의 일본에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 인정하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눈에 들어오는 전후(戰後) 일본문명의 조로(早老)현상은 역사청산의 기피에 연유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

    과거청산 없는 수교를 받아들인 한국 측에도 후과는 오늘에 남았다. 현실의 필요가 있다 해도, 양국이 합심하여 보다 고차원의 국가전략을 공조할 수 있는 바탕을 국민의 마음속에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국에 온 일본의 한 외교관이 양국민의 연(年) 500만명의 왕래를 대단하게 여긴다는 말을 하던데, 1000만명이 되어도 과거청산을 대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게 한일관계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여기서는 주로 그때의 수교회담 기간 중에 일본의 정상들이 과거청산과 관련하여 드러낸 생각과 자세를 확인해 두고자 한다. 마음밭 정비를 위한 이정표가 보일 것이다.

    회담진행과 타결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요시다(吉田), 이케다(池田), 사토(佐藤) 수상 등은 모두 A+나 A급 수상이었고, 잿더미 속의 전후 일본을 일으켜, 경제대국으로 밀어올린 지도자들이다..
    1951년 10월 제일 첫 예비회담에서 한국 측의 수석대표인 양유찬 주미대사가 읽은 영어 연설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타이프를 쳐서 작성한 것이었다.
    연설은 과거 40년간에 걸쳐 조선에서 일본이 저지른 죄상을 고발하는 톤이었다.
    일본 측이 즉각 반발하고 나왔다. 한국 측의 연설 속에 있는 “화해하자”라는 구절을 일본 측 수석대표인 이구치(井口) 외무차관이 낚아채었다. “화해가 무슨 말이냐”고 나온 것이다. 연이어서 “당신들 쪽하고 우리는 서로 다툰 일이 없으니까, 원한이 있을 리가 없는 것 아닌가”라고 한 것이다. 일본 측은 생판 시치미를 떼고 나왔는데, 과거청산은커녕 직시조차 않겠다는 명확한 배짱을 내밀었던 것이다. 이 배짱이 당시의 원맨 수상 요시다(吉田茂)의 복안인 것은 물으나마나일 것이다.

    자세한 얘기는 따로 하고, 결렬된 1차회담을 이어가고자, 한국전쟁 때문에 급했던 미국 측이 주선하여, 도쿄에서 1953년 1월 이승만-요시다 회담이 있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요시다 수상에게 “일본은 40년에 걸친 조선통치를 한국에 사죄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요시다 수상은 “그것은 일본군벌(軍閥)이 한 짓이다”라고 받았던 것이다. 과거회피의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요시다는 미국의 재무장 압력 속에서도 경제입국의 국가전략을 관철해 낸 역대 일본 수상 중에서 초A급이었다. 이런 그가 군벌 핑계나 대어, 자민족의 과거사를 일신(一身)의 두 어깨에 지겠다는 거인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쉽다 해야 할 것이다.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이 드골 대통령 앞에서 히틀러 핑계를 대지 않고, 독일의 과거사에 대해 참회해 보임으로써, 훗날의 통일과 EU의 리딩국가로 가는 문을 연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복잡한 과정은 접어두고, 1962년 11월 청구권 규모를 결정지은 그 유명한 김-오히라(大平) 메모에 합의함으로써, 양측은 회담의 결정적 고비를 넘겼다. 이 김-오히라 메모를 재가한 수상이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였다.
    재가를 하고 난 다음인 1963년 1월 일본국회에서 이케다 수상에게 질의가 있었다. 한 야당의원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조선인에게 노예노동을 강제한 것을 들어, “조선인민에 대해 이처럼 무도한 짓을 한 가지가지에 대해, 총리는 진지하게 반성하는가, 어떤가”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케다는 “조선을 병합하고 나서의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과문(寡聞)이라서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高崎宗司, 《檢證 日韓會談》, 岩波新書)고 했다.

    한국사람들이 눈앞에 없다고 이렇게 말장난해도 그만이었다는 말인가. 한일회담이 시작되고 10여 년이나 지났는데, 과거하고 관계되는 자금을 한국에 건네기로 재가한 수상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과거청산과는 거리가 먼, 역사의식의 치명적 부재를 드러내는 말이다. 일본의 권력중추가 수교회담을 보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불성실하고 방자했던 것을 이케다의 답변을 통해 알게 된다.
     
    참회 없이 일본의 ‘민족적 회춘’ 불가능
     
    한일회담이 1965년 타결, 조인, 비준되던 때의 수상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였다.
    비준국회에서 야당의원이 사토 수상에게 질문했다. “병합조약은 대등한 입장에서 맺어진 것인가” 사토 수상은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사로 이 조약은 체결되었다, 이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조인된 기본조약을 통해 일본정부는 한일합방조약이 1948년 한국독립 때까지 유효하다고 할 수 있게 되니까, 야당은 수상에게 합방조약의 결격성을 따진 것이다. 이에 대해 사토 수상이 합방조약이 정당히 체결된 조약이라고 답함으로써, 합방의 정당성을 수교 이후에도 관철할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요시다 시게루 수상에게 요구했던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 등의 과거 청산은 없을 것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답변이기도 했다.
    과거청산 없이 한일수교의 막은 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다카미 준이 지적했던 ‘조선에 대해 일본인 전체가 느끼고 있던 일종의 죄악감’을 털어버릴 기회를 붙들지 못하고 말았다.
    죄악감을 털고 아이덴티티가 탄탄해져야, 민족적 회춘(回春)은 가능하지 않을 것인가. 사과하라고 보채던 한국도, 이제는 마음에도 없는 일본 측 사과 레토릭에 기대어 자아(自我)를 지탱하던 시대는 지났다.
    불행이다, 유감이다, 통석(痛惜)이다로 레토릭이 아무리 진화한들, ‘조센진’에 열등인종 낙인 찍어 만들어버린 ‘토인비의 도랑’은 메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한다면 참회가 있을 뿐이다. 동아시아 평화 구조를 위해 시간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월간 조선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