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本人이 韓民族에 감탄하였을 때  
     趙甲濟   
     
      서기 676년 일본의 天武천황은 唐과 싸우는 신라에 物部麻呂(모노노베노마로)라는 사람을 대사로 보낸다. 이때 일본은 신라 편에 서기로 하고 親신라 정책을 펴고 있을 때였다. 신라로 떠나는 마로 대사에게 지금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사람이 부탁했다.
      “신라에 가거든 모노노베씨, 부탁이 있는데 그 나라의 兵制를 보고 왔으면 하네”
      그는 부연설명을 했다.
      “신라는 300년 동안 전쟁만 한 나라이다. 백제와 싸워 이기더니 북방의 강국 고구려와 싸워서도 이겼다. 지금은 세계제국인 唐을 상대로 한반도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걸고 싸우고 있다. 당연히, 군사면에선 물론이고 전략전술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을 것이다“
      국방차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전투가 있으면 직접 戰場에 나가서 唐과 신라의 전법을 보고 오게.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은 신라가 어떻게 하여 唐과 싸우고 있는지 알아야 우리가 방위책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될 걸세”
     
      신라 파견 大使가 된 마로가 신라에 가서 본 것은 大國 唐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는 순종하면서도 싸워야 할 때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韓民族의 모습이었다.
      신라는 唐과 싸우면서도 불리하면 唐의 황제에게 굴욕적인 사과문을 보냈다. 이제는 신라가 손을 들겠구나 하고 안심하고 唐軍이 쳐들어오면 신라는 다시 들고일어나 백제, 고구려 유민과 함께 손을 잡고 唐軍을 격퇴했다.
     
      마로 대사는 일본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면 抗戰, 일면 사과’의 신라 전술을 보고는 “대륙에 붙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런 굴욕도 참지 않으면 안되는구나”하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로 대사는 신라 사람들이 굶어가면서도 對唐결전의지를 꺾지 않는 것을 보고는 감탄한다. 마로 대사는 “지금이야말로 唐軍을 몰아내어 한민족의 국가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열정으로 모두가 불타고 있다”고 판단했다.
     
      676년 겨울 신라는 서해의 기벌포에서 唐의 해군과 결전한다. 신라 해군은 초전에서는 졌으나 곧 반격을 개시하여 결국 唐軍을 패퇴시킨다. 마로는 이 전투를 구경한다.
      <唐船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신라의 장병들은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추격을 중단하고 도망가는 唐船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겨우 자신들이 唐에 이겼다는 것을 깨닫고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배의 갑판 위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신라의 승리에 충격을 받은 것은 일본 사절단이었다. 당은 백촌강 해전에서 일본해군을 전멸시킨 超강대국이었다. 지금의 상황으로 국제비교를 해보면 唐과 신라는 지금의 미국과 한국의 차이보다 국력 차가 더 컸다. 그 작은 나라 신라가 세계제국인 당을 무찌르고 독립을 지켜낸 것이다. 서기 676년 음력11월의 일이었다. 신라의 판도는 지금의 한국에다가 북한의 3분의 1을 보탠 규모였다. 마로는 통일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677년 2월1일 귀국했다.
     
      위의 내용은 ‘古代로부터의 증언-壬申의 亂’이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산케이신문 편집위원 야기소우지(八木莊司)씨이다. 천무천황은 신라의 실력을 알아본 뒤 30년 동안 唐과는 국교를 단절하고 신라하고만 대규모 사절단을 교환한다. 일본은 이 30년간 신라로부터 선진문물과 제도, 특히 통일국가를 완성시킨 비결을 배워 와서 일본의 고대국가를 정착시키는 개혁을 한다.
     
      천무천황은 壬申의 亂이란 쿠데타로 집권할 때 신라 도래인의 지원을 받았었고 그 자신이 신라계 사람이란 說도 있다. 唐에 만약 신라가 복속해버렸다면 오늘날 한민족은 존재하지 않고 그때 이미 중국인화되었을 것이다. 신라를 속국으로 만든 唐은 元이 고려를 복속시킨 뒤 그랬던 것처럼 신라군과 함께 일본을 침공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對唐결전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일본인도 없었을지 모른다. 신라가 당의 정복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었기 때문에 그 뒤 약 200년간 동아시아에선 평화가 유지되고 찬란한 문명이 꽃피었다. 당시 唐은 세계文明의 중심을 잡았고, 신라는 선진국이었다. 신강성의 省都인 우루무치의 박물관에 가 보면 당나라 때의 지도가 있다. 당과 陸續(육속)한 나라는 전부 청색인데 유일하게 한반도만 백색이었다. 신라가 대륙의 유일한 독립국이었던 것이다.
     
      신라를 미워하는 속성을 가진 일본인들도 감탄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저주하고 깎아내리는 것을 業으로 삼고 있는 역사학자들이 한국에 많다. 민족사의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러우며 결정적인 위업을 굳이 부정하려 드는 것은 신라의 민족통일국가 수립의 바탕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建國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대한민국의 수립은 민족사의 2大사건이다. 두 사건중 하나를 부정하면 나머지 하나도 부정하게 된다. 자유통일을 지향하는 오늘의 한국인이 교과서로 삼아야 할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이고 참고서로 볼 만한 것은 독일통일이며 反面교사로 경계할 일은 월맹이 성공한 월남적화통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