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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북한이 1일 전격 주장한 남북 비밀접촉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이다. 북한은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지난달 9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관계자들을 만나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안에 3차례 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회담을 빨리 개최하자고 ‘돈봉투’까지 주면서 유혹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청와대의 침묵은 당혹감의 다른 몸짓이다. 비밀접촉이라는 형식답게 비밀에 부쳐져야 할 남북 접촉 내용이 예기치 않게 공개된 데 대한 대응 방식을 쉽게 찾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날 북한의 일방적인 주장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청와대 관련 수석실의 반응은 모두 똑 같았다. 천영우 외교안보수석을 비롯해 김영호 통일비서관, 북한에 의해 비밀 접촉 당사자로 지명됐던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 등 외교안보 라인의 모든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나 청와대의 입장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과의 접촉을 일부러 피했다고 볼 수 있다.
대신 청와대는 이날 오후 조선중앙통신 보도 직후 임태희 대통령실장 주재로 천 외교수석 등 관련 수석들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장시간 논의 끝에 북한 주장에 대한 정부의 첫 논평을 통일부가 내는 것으로 정리했다. 청와대는 일체 대응치 않는다는 전략이다.
청와대의 침묵은 북한의 일방적 주장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어 보인다. 폭발성 큰 북한의 주장에 정색하고 즉각 대응할 경우 오히려 북한 전술에 말려들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의 주장이 맞느냐는 부분에 대해 의문이 드는 점도 있다. 북한은 베이징 남북 비밀접촉이 지난 5월 9일부터 있었다고 주장했다. 우리 정부측 참석자로 통일부 김천식 정책실장, 국가정보원 홍창화 국장, 청와대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을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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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5월9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총리공관에서 한-독 정상회담 뒤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9일 당시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은 이 대통령을 수행중에 있었다.
그러나 김태효 비서관은 5월9일 독일 베를린에 있었다. 5월 10일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었다. 모두 5월8일 서울을 출발, 독일-덴마크-프랑스 3개국을 순방하고 5월15일 귀국한 이명박 대통령을 수행한 날이다.
김 비서관은 5월9일 오전 8시44분(이하 현지시간) 이 대통령의 유럽순방을 동행 취재 중이던 기자들을 대상으로 현지 프레스 룸에서 브리핑을 가졌다. 현지시간 오전 8시44분이면 한국시간으로 오후 3시44분이 된다. 한국이 독일보다 시차가 7시간 빠르기 때문이다.
김 비서관은 또 다음날인 5월10일 오후 2시30분에 현지 프레스 룸에서 취재진에게 브리핑을 했다. 이 대통령은 10일 오전 베를린을 출발, 오후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었다.
김 비서관은 5월9일과 10일에는 물리적으로 베이징에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북한의 주장은,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거짓이 된다.
문제는 북한이 비밀접촉 날짜를 언급하면서 접촉 시점을 ‘5월9일부터’라고 말한 점이다. 북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 비서관은 이 대통령 수행 중 남북 비밀접촉을 위해 유럽에서 급히 베이징으로 날아간 셈이 된다.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김 비서관과 연락을 취했으나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와 함께 청와대가 침묵하는 배경에는 남북 대화의 최종 판은 깨지 않겠다는, 고육책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어이없는 북한 공세에 청와대 명의의 강경한 비판 입장을 낼 경우 현 정부 내 남북대화는 완전히 물 건너 간다는 점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남북대화 역사가 증명하듯 극적 반전의 계기가 쌀 한 톨 만큼에 불과할지라도 여지를 남겨 놓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1994년 김영삼 정부 때도 북핵 문제로 남북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이후 남북 정상회담 성사로 돌아선 적이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의 허황된 주장에 일일이 대꾸해 줄 수는 없다. 특히 청와대가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청와대가 대응하지 않고 통일부로 넘긴 것은 북한 국방위원회의 언론 문답이 대단한 것처럼 청와대가 반응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정부 당국자의 설명도 있었다.
이 대통령은 참모들로부터 북한 국방위의 주장을 보고 받았지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대통령은 임 실장 등으로부터 대책회의에서 결정한 대응 방안을 보고받은 뒤 "그렇게 하라"고 승인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