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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을 죽게 한 김정일
외교권력밖에 없었던 김일성은 궁여지책으로 말년에 통일외교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려 했다.
장진성
7월이면 북한은 김일성 영생을 기원하는 각종 행사를 벌인다. 이는 김정일의 세습통치를 김일성의 유훈으로 미화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김정일과 김일성과의 권력 갈등은 그 어느 세습정권보다 심했다.
김일성 사망날짜는 1994년 7월 7일이다. 그 마지막 날짜까지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다 사망했다. 당시 김일성이 얼마나 통일 환상에 빠져있었으면, 김영삼 대통령의 평양방문 후 답례로 서울에 가서 읽을 연설 원고까지 이미 써놓았다.
“서울 시민여러분! 백두산의 김일성이 왔습니다.”로 시작되어, “북조선은 주먹이 강하고 대신 남조선은 잘산다. 이 둘을 합치면 우리 민족은 무서울 것이 없다. 나진-선봉, 청진 황금의 삼각주를 왜 남들에게 주겠는가? 남한에 개방한다는 내용”이다.
김일성의 그 자필연설 원고는 유품과 함께 고려연방제통일업적 선전용으로 한때 금수산 기념궁전에 공개 전시되기까지 했다. 또한 <4.15 문학 창작사>에서 출간한 김일성의 마지막 7월을 주제로 하는 장편 소설에서도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그 소설에선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백두산의 호랑이 김일성이 왔다”고 수정하도록 부추기는 묘사가 있다.
그런데 실상은 정 반대였다. <김조실록> 편찬 자료들 중 그와 비슷한 시기인 1994년 7월초 김정일이 직접 주관한 당중앙비서회의 문서가 있다. 그 문서는 “지금의 정세상황에선 조국통일보다 사회주의 수호를 위한 실천적 발전방안들이 더 모색되어야 할 때”라고 강조하는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김정일의 이 체제불안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왜 무리하게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을까? 그 이유는 김일성에겐 외교 권력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김일성 유일 지도체제' 명목으로 그동안 사실상의 '당 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구축한 김정일에 밀려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여생을 외로이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1980년 10월에 열렸던 6차 당 대회 이후 2009년까지 북한이 단 한 번도 당 대회를 가지지 않았던 그 공백이유에 대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일각에선 북한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며 당 대회명분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해석이다. 북한 노동당이 비정상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김정일과의 관계가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암투 초기 김일성은 김정일의 과도한 권력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김평일을 평양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당정치국 회의에서 당 조직비서(아들 김정일)에게 여자가 너무 많다고 공개 비판한다. 그러자 권력불안을 느낀 김정일이 '김일성의 당 총비서 권력'이었던 정치국회의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그렇게 유명무실해진 당 중앙기능에 의해 당 대회가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당 조직비서 유일비준제도' 때문에 모든 권력을 상실한 김일성은 당 총비서로서 당회의 소집제안을 할 수 있는 형식적 권력마저도 가질 수 없게 됐다. 년 중 단 한 번 김일성이 공개 발언을 할 수 있는 신년 연설도 생중계가 아니라 녹화편집 중계를 걸치도록 제한받았다.
하여 말년에 김일성은 궁여지책으로 통일외교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려 했다. 그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 바로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의 평양방문이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외교를 내세워 북핵 문제를 완화시키도록 지미 카터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카터 대통령과의 사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정상회담을 수락한다는 돌출발언을 하게 된다. 김정일은 당황했으나 이미 세상에 알려졌고, 또 북핵 해결 연장선에서 남북화해 카드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정치적 타산으로 처음엔 이를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점점 기정사실로 발전해 가고 있는 남북정상회담과 통일 분위기는 김정일의 권력명분을 위협했으며, 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정일은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업무를 교묘하게 방해했다. 김일성의 영생을 기원하는 북한 기록영화에는 사망 당일인 7월 7일 김일성이 직접 내각 상들을 불러 회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엔 철도상이 일어나 발언하고, 이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김일성에게 김복신 여 부총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의 실체는 이렇다. 김일성이 철도 상에게 김영삼 대통령이 육로로 오게 하려면 개성부터 평양까지 지금의 단선철도가 아니라 복선철도를 놓아야 하는데 6개월이면 가능하냐고 물어본다.
철도상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자, 격노한 김일성이 그 이유를 따져 묻는다. 노동자들에게 쌀을 주면 가능하다는 철도상의 말에서 배급이 중단된 사실을 처음 안 김일성은 즉시 회의장 밖으로 나간다. 북한 강연 자료들에선 김일성이 그날 '업무 과 부담'으로 유달리 담배를 많이 찾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그 상황이 있은 직후부터였다.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온 김일성이 탁자를 치며 몹시 흥분해 있자, 김복신 부총리가 김일성을 위로하기 위해 4월에 주지 못했던 학생들 교복을 7월이면 공급을 다 끝낼 수 있다고 대답하게 된다. 그날 오전회의는 끝내 더 하지 못하고 오후 회의를 위해 회의장을 다시 찾았던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첫 심장 발작을 일으키게 된다.
김정일의 지시로 내각 상들이 모두 평양으로 호송되고, 회의장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헬기는 도중에 추락되고, 두 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땐 이미 김일성의 심장은 멎어 있었다. 그 시간대에 평시 앙숙관계였던 김일성 경호 <1호 호위총국>과 김정일 경호 <2호 호위총국> 사이에 일부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2호 호위총국>이 <1호 호위총국>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게 되며, 다음날인 7월 8일, 김일성 사무실을 통제하던 김정일 측근들에 의해 김정일의 세습통치가 김일성의 유훈교시로 조작 선언된다. 아직도 김정일이 김일성을 암살했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지만, 김일성의 사망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장진성 / 시인, 본지 객원논설위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북한 前(전) 통일전선부에서 근무하다 2004년에 脫北(탈북)해 남한에 정착했다. 저서로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서사시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가 있다.
<편집자 주>
그는 김일성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대남 공작기구인 통전부에 발탁됐다. 탁월한 필력으로 김정일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이 글은 그의 통전부 근무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권력투쟁을 북에서 직접 목격한 경험에서 나온 글인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의 글보다 생생한 관찰과 사실을 기초로 작성됐다고 평가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