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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전국적으로 일어난 정전사태의 원인에 대해 지식경제부와 한국전력, 전력거래소 등은 “늦더위에 전력수요 급증으로 지역별 순환단전을 실시했다”고 해명했다. 16일 한전과 전력거래소 등은 “16일부터는 전력수급에 문제없다”고 말했지만 오후 2시 30분경부터 또 다시 전력수급이 늘면서 ‘비상단계’에 돌입했다는 속보가 흘러 나왔다.
지식경제부, 한국전력, 전력거래소 비난여론 봇물
15일에 이어 16일 오후 또 다시 ‘전력 수요 급증으로 비상단계’라는 속보가 나오자 언론은 물론 시민들도 술렁였다. 16일 오전 임종룡 총리실장 주재로 전력수급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전력거래소는 이날 ‘전력 수요 안정 전망’이라고 밝힌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문제가 생길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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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전국적으로 발생한 정전사태 피해 규모는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16일 오전 총리실이 주재한 점검회의에 따르면 총 212만여 호가 정전 피해를 입었다. 이 중 행정관서 201곳, 금융기관 148곳, 554개 지방공단, 139개 종합상가가 포함돼 있었다. 정전부하는 최대 500만kW였다. 기업은 주로 중소기업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 수가 16개 산업단지에서 5,775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트와 편의점 등 유통업체들은 냉장·조명시설과 POS 등 결제시스템, 사무기기 가동이 중단돼 영업에 상당한 차질을 빚었다. 전국 각지의 횟집에서는 정전으로 산소공급기가 작동 중단돼 수십만 마리의 활어들이 폐사하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은행 또한 무정전 전원장치(UPS)를 갖춘 대형 기관은 별 피해가 없었지만 전국 은행점포 7,400여 개 중 417개 소형점포는 정전을 피하지 못했다. ATM기를 사용하다 정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 수는 아직 집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전국의 사무실 밀집지역 등에서는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사고가 속출했다. 16일 오전까지 소방방재청 등에서 집계한 전국 엘리베이터 사고 건수는 940여 건에 달했다. 전국 수백 개의 신호등도 정전으로 먹통이 되면서 교통 혼잡도 빚었다.
정전도 재난일까? 재난 대비 적절했나?
이처럼 전무후무한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한국전력 등의 피해보상기준을 적용하면 ‘800원’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일부 국민들은 집단소송을 준비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국회 지식경제위원회도 지식경제부와 한국전력, 전력거래소 관계자들을 불러 ‘정전사태’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하지만 관계기관들은 "보상을 하겠다"고 밝히면서도 정전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가을 늦더위에 갑자기 전력수요가 급증하면서 일어난 ‘사고’였다”고만 되풀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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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의 여파는 <KBS>로도 튀었다. 15일 오후 3시 30분부터 <YTN> 등은 정전 소식을 전하면서 국민들에게 도움을 줬는데 정작 재난 보도를 맡아야 하는 <KBS>는 ‘대규모 정전’이라는 간략한 자막만 내보낸 뒤 ‘6시 내고향’ 등 정규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송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과 부적절한 조치는 ‘정전’을 재난으로 보지 않는 시각에서 시작된다. 1980년대 이후 ‘정전’이 거의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전국적인 규모의 정전이 일어나리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15일 전국 650만 가구와 수천 개 업체가 정전으로 피해를 입자 국민들은 대규모 정전도 ‘재난’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940여 건이나 되는 엘리베이터 사고 피해자들은 몇 시간 동안 공포에 떨어야 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휴대전화가 불통이 되고, 교통신호가 꺼지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
일부 사람들은 정전 사태를 겪으며 영화 ‘다이하드 4.0’을 떠올렸다. 영화에서 악당들은 미국의 전력공급시스템을 마비시키려 한다. 전력공급을 끊을 경우 제조업은 물론 교통, 금융 등 모든 것이 마비되면서 국가행정시스템도 마비되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예비전력량이 급감해 전체 전력망이 마비되는 ‘블랙아웃’ 상태까지 갔다면 우리나라에서 ‘다이하드 4.0’을 재연할 뻔 했다.
정부는 16일 총리실 주재 점검회의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 때 언론, 소방, 경찰 등 유관기관 간 공조체제가 미흡했고, 기관별 위기대응 매뉴얼이 서로 달라 상황대처가 미흡했다는데 각 관계 부처들도 공감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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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앞으로 총리실 주관으로 정부 합동점검반을 구성, 수급위기 원인 파악, 대응체제 점검, 피해상황을 파악해 대응할 계획이라고 한다.
日언론들, “우리나라에는 지진나도 그런 일 없는데….”
15일 정전 사태에 일본 언론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6일 조간에서 ‘한국에서 무더위로 전력 수요가 일시적으로 급증하면서 아무런 예고 없이 5시간 대규모 정전사태를 겪었다’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대규모 정전으로 은행의 창구업무 등 경제활동에 지장이 초래되고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이 속출하는 등 시민 생활에 혼란이 확산됐다’며 ‘한국은 전력요금이 일본의 약 3분의 1로 싼 것이 특징이지만 안정 공급체제의 확립이라는 과제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요미우리신문>은 ‘한국 각지에서 예고 없는 정전으로 162만 가구가 큰 불편을 겪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도 ‘한국에서 늦은 무더위로 전력 수요가 일시에 급증하면서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일본 언론들이 한국의 정전 사태를 보도한 것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전력난이 예상된 일본에서는 오히려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전이 있었어도 지진 피해를 입은 송전망 때문에 전력회사가 사전예고를 한 뒤 지역별로 교대로 전력을 사용하는 '계획정전'이었다.
일본은 지금도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전국의 원전 54기 가운데 42기가 가동 중단된 상태다. 일부 화력발전소도 대지진과 쓰나미 피해로 제대로 가동을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로 인한 전력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7월 1일부터 도쿄전력 관내와 도후쿠(東北)전력 관내에 전력사용제한령을 발동했다. 전력사용제한령을 발동하기 전인 6월 29일 도쿄의 기온이 섭씨 35도로 치솟으면서 도쿄전력 관내 전력수요가 최고 4천570만㎾로 최대 공급능력(4천900만㎾)의 93%에 육박하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전력사용제한령으로 수도권과 미야기현, 이와테현, 후쿠시마현 등 대지진 피해지역의 공장 등 대규모 전기 수요처는 의무적으로 15% 절전을 실시했고 일반 가정은 자발적으로 절전을 실시, 정전사태 없이 여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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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공중파 방송사들도 전력사용제한령 기간에 시간대별로 전력 수요량과 공급량을 방송해 전력 수요가 몰리는 시간대에 국민의 자발적인 절전을 유도했다. 기업체는 절전을 위해 집중근무제를 실시하거나 출퇴근 시간을 조절하는 등 근무 형태까지 바꿨다. 일반 가정은 섭씨 35도를 넘는 무더위 속에서도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사용하는 등 절전에 동참했다.
전력수요예측 실패 이후 정전 대응, ‘절전’만이 대안일까
그렇다면 일본의 사례처럼 대규모 정전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절전’ 밖에 없을까. 이는 일부만 맞는 이야기다. 16일 오후 3시 <YTN>등이 ‘예비전력 급감…비상관리’라고 보도한 뒤 전력거래소에 현재 상황을 묻자 “오후 3시가 되기 전 예비전력량 430만kw를 회복해 별 다른 어려움은 없다”고 밝혔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지금 우리가 여론의 타겟이 되어 있는데 사실 기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5일 대규모 정전의 가장 큰 원인이 ‘산업용 전기’라고 설명했다. 산업용 전기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 ‘산업용 전기’의 가격이 너무 저렴해 기업들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탓에 가정이나 관공서 분야에서의 ‘절전’도 의미 없게 만든다고 지적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의 전기요금 체계는 가정용, 산업용, 일반용(건물이나 상가 등), 농어업용, 교육용, 시설용(가로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가정용 요금이 가장 비싸다. 100kw까지는 1kw당 56.20원이지만 100kw를 초과하면서부터 누진세가 적용된다. 반면 산업용 전기요금은 원가에도 훨씬 못 미치는 요금을 받는 데다 누진세 적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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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강창일 의원(민주당. 제주 갑)이 밝힌 바에 따르면 2010년 전기 사용량 상위 10개 업체의 전기 요금은 1kw당 평균 67.56원으로 한국전력 전기요금 평균인 87원 보다는 20원 가량, 산업용 평균요금인 1kw당 76.63원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창일 의원은 “지난해 전기소비량 상위 10개 업체의 전기요금은 1조7,801억 원으로 발전원가에 비해 7,485억 원이 저렴해 그만큼의 적자를 한국전력이 떠안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강창일 의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업체가 내는 연간 전기요금이 3,039억 원인데 만약 일본에서 같은 량의 전기를 쓰면 8,083억 원, OECD 평균 전기요금 기준으로 보면 5,591억 원을 냈어야 한다”며 산업용 전기요금이 지나치게 저렴하게 책정돼 있다고 지적했다.
강창일 의원의 지적처럼 우리나라 전기 수요구조를 살펴보면 절반 가까이가 산업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8년 말 기준으로 가정용 전기 사용량은 전체 사용량 대비 14.9%, 공공기관은 4.4%에 불과하다. 상업용 등 서비스업과 전철에서 사용하는 전기를 모두 합쳐도 30% 남짓이다. 나머지 51.5%가 산업용으로 사용되는데 그 중 48.9%를 제조업체에서 사용한다.
누가 그 많은 '전기'를 낭비했을까
이 같은 전력소비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한국전력의 적자는 해가 갈수록 크게 늘고 있다. 2008년 국제유가가 배럴 당 100달러 이상으로 폭등한 뒤 올 상반기까지 누적적자는 7조7,362억 원에 달한다. 이런 적자 급증의 가장 큰 원인이 산업용 전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최근 물러난 김쌍수 사장은 “이대로 가면 영원히 적자를 면치 못할 것”이라며 한탄했다.
정부도 이런 한전 측의 호소를 고려해 지난 8월 1일 전기요금을 평균 4.9% 인상했다. 당시 지경부 측은 “서민 생활안정을 위해 주택용은 2%만, 영세사업자용 상업용 요금과 중소기업용 산업용 요금은 2.3%만 인상하고 농어업용 전기요금은 동결한다”고 밝혔다.
지경부는 “대신 대형건물용 상업용 고압요금, 대기업이 사용하는 산업용 고압요금에 대해서는 에너지효율 합리화를 유도하기 위해 6.3% 인상했고, 에너지 낭비가 심하다는 지적을 받은 심야 시간대 요금을 대폭 인상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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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력업체와 일부 언론은 “요금 인상을 해도 산업용 전기가 싸기 때문에 제조업체들이 마음껏 전기를 사용한다”며 “만만한 주택용이나 일반용(상업용) 전기요금을 현실화할 게 아니라 대기업 등 제조업체들이 사용하는 전기요금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야 전기요금이 현실화되면서 기업들도 요금부담을 줄이기 위해 현 정부가 추진하는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합류하면서 관련 산업도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될 것이고, 한전 또한 적자에서 벗어나게 되며 이번과 같은 대규모 정전 사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의견이다.
지난 6월 20일 지경부는 '여름철 전력수요 비상대책반'을 가동한 데 이어 9월 8일에는 '올 여름 전력난이 없었던 이유'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여기서도 늘 강조하는 건 '만만한' 가정용 전기와 상업용 전기 사용자들에게 '절전'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전기요금 '폭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산업용 전기' 사용자들이 '절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전 사태는 언제 어떻게 닥칠 지 모르는 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