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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억류 중인 ‘통영의 딸’ 신숙자 씨(69) 모녀 월북 사건에 세계적 현대음악 작곡가이지만 동족 수백만명을 죽인 김일성에 평생 충성을 다한 윤이상만 연관된 게 아니다. 독일에서 야채상을 하고 있는 ‘김종한’ (71)이 윤이상과 함께 주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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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남(69) 박사는 1985년 12월 유학생활을 하던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의 공작에 넘어가 부인 신숙자 씨(69)와 딸 혜원(35)ㆍ규원(32)씨를 데리고 월북했다.
이후 오 박사는 "먼저 탈출한 뒤 우리를 구출해달라"는 부인의 권유로 북한을 탈출, 부인과 두 딸 구명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규원은 지금도 북한에 잡혀 있다. 공교롭게도 신숙자씨는 윤이상과 같은 통영 출신. 이 사건이 '통영의 딸'로 불리며 널리 알려지면서 '오 박사 가족을 속여 월북을 유도한 주요 인물이 작곡가 윤이상'이라는 언론 보도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오 박사는 2일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작곡가 윤이상은 당시 북한의 대남 공작총지휘부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지시를 했을지는 몰라도 나를 포섭하는 데 실질적 역할을 한 것은 김종한이다.”라고 밝혔다.
오 박사는 지난 6월 6일 발행된 자신의 책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에서 “김종한은 나에게 북한 공작원을 처음 소개시켜준 사람”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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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따르면 김종한은 당시 오 박사에게 “북한은 오 박사를 경제학자로 모셔가려 하고 있다” “남한은 엉터리 국가인 반면, 북한은 민족 통일을 이룰 만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며 월북을 권유했다.
이와 관련, 1992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도 보도자료를 통해 김종한의 간첩활동을 설명한 바 있다. 안기부 자료에 따르면, 오길남 박사는 1985년 12월 독일 유학중 일가족 3명과 함께 입북했다 독일로 재탈출, 망명생활을 하다 자신의 간첩활동을 자수하고 입국했다.
오 박사는 1985년 7월 독일 브레멘大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졸업 후 직장을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 신 씨가 간염으로 앓아눕는 바람에 생계까지 위협을 받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오 박사의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교포 김종한이 오 박사 가족에게 입북을 권유했다. 김종한은 그 전부터 오 박사와 그 가족 주변을 돌며 독일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야채상 주인이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오 박사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김 씨의 유혹을 못 이긴 오 박사는 구라파의 북한대남 공작책 백치완 등에 가족과 함께 인계돼 월북했다.
오 박사의 책에는 그가 월북 후 다시 독일로 홀로 돌아온 후 김종한과 통화한 내용도 나온다.
오 박사는 “아내와 두 딸을 독일로 데려올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시오. 당신은 북한에 높은 사람들을 많이 알지 않소”라며 “그렇게만 해준다면 (김 씨가) 나를 택해 북한에 유인한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조용히 살겠소”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김 씨는 “개XX, 내가 개XX의 XX들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러는 거냐”며 욕설를 퍼붓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오 박사는 가족들 생각에 김종한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오 박사는 결국 ‘속았다’는 생각과 함께 자포자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 박사는 김종한과 연락이 끊어진 것을 계기로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 자수하게 됐다고 한다.
오 박사는 “그때 서야 (김종한에게) 속았다는 것을 명확히 알았었다. 배신을 당한 비참함은 형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종한의 '두 얼굴'에 대해서는 치를 떨었다.
“월북 전에는 야채를 팔다 남으면 가져다주는 등 (김종한은) 매우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태도가 돌변할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현재 그의 소식을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죄값을 받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오 박사는 “북한을 탈출한 후 5년 5개월 동안 가족을 찾기 위해 혼자 노력했었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면서 “다행히 한국에 온 후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있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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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종한은 오 박사 가족들을 북한으로 보내고 몇 년 뒤 재독교포를 대상으로 한 한글학교 '세종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김 씨는 15년 동안 이 학교 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