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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합(總合)] '비리(非理)의혹 종합선물세트' 박원순의 정체
언론이 만든 고결한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의혹투성이 인물.
조갑제닷컴(金泌材) -
朴元淳(박원순) 변호사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汎(범)좌파 단일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朴변호사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소통을 가장 잘하는 인물로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朴변호사의 발언, 저술, 칼럼 등 그동안의 행적을 살펴보면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다르게 좌파적 이념(理念)에 매우 충실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朴변호사의 행적은 ▲대한민국에 대한 일관된 貶毁(폄훼) ▲헌법(憲法)파괴세력에 대한 일관된 擁護(옹호) ▲반(反)헌법적 6.15공동선언 및 10.4공동선언 구현 ▲북한 인권문제 傍觀(방관) 및 김정일 정권에 대한 일관된 옹호로 요약된다. <주>
■ 현대사(現代史) 인식: “친일(親日)부역자들, 해방조국 권력 장악”
박원순 변호사는 《역사를 바로 세워야 민족이 산다》, 《야만시대의 기록》 등 왕성한 저술활동과 함께, 대표적 현대사 왜곡 센터인 ‘역사문제연구소’(1986년 설립) 初代 이사장을 지내면서 좌파적(左派的) 역사관을 우리사회에 확산시켜 왔다.
朴 변호사는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가 정권을 잡고 ‘민주주의가 압살’ 된 시대이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는 ‘지옥 같은 고문이 일상화 됐던 시대’라고 주장해왔다.
그는 자신의 著書(저서)인《역사를 바로 세워야 민족이 산다》에서 “해방과 동시에 당연히 처단되었어야 할 친일부역자들이 오히려 새로운 해방조국의 권력을 장악하고 그 아래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시련과 고난을 당해야 했던 것이 바로 웃지 못 할 우리 과거의 솔직한 모습이었다”면서 대한민국 건국(建國) 세력을 친일파 집단으로 폄하했다.
朴 변호사는 친일 부역자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역사 왜곡을 했는데, 이승만 초대 내각에 친일파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의 초대 내각이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부주석, 일제시대 헌병 보조원)를 비롯, 친일파 일색인 것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朴 변호사는 또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공산세력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부 과오를 과장해 현대사가 “암살과 학살, 고문과 처형, 투옥과 연금, 재산 약탈 및 몰수가 이뤄진 암흑의 시대”였다고 비난한다. 이와 함께 그는《야만시대의 기록》에서 공산폭력혁명조직 남민전을 비롯, 대다수 공안사건을 “고문으로 용공 조작된 사례”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간첩사건은 實在(실재) 했다기 보다는 당시 정치적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조작되었음이 밝혀졌다…(중략) 중앙정보부는 간첩단사건과 조작사건을 자유자재로, 무소불위로 만들어냈으며 그 모든 사건에서 고문의 호소와 주장이 이어졌다. 이미 검찰과 사법부는 중앙정보가 고문으로 조작․송치하는 사건에 대해 무혐의 또는 무죄로서 대응할 힘과 의지를 잃은 지 오래였다.” (《야만시대의 기록》 제2권, 314페이지)
朴 변호사는 한국 현대사 좌(左)편향 왜곡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역사문제연구소’(1986년 설립)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역사문제연구소’ 출신의 학자들은 이명박 정부 들어 새로 발간된 좌편향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에 대거 참여했다.
‘역사문제연구소’에는 강만길(고문), 임헌영(운영위원), 강정구(연구위원) 등의 좌파인사들이 활동 중이다. 이들 가운데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은 학계에서 줄곧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철수, 한총련 합법화를 주장해온 인물이다. 임헌영(本名 임준열,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 등 수 차례 공안사건에 연루됐던 인물이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 前 서울고검장)가 2010년 발표한 ‘親北(친북)-反국가 행위자 100인’ 명단에는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활동 중인 학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명단에는 학계(전-현직) 관계자가 17명이 선정됐는데, 이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6명이 역사문제연구소의 이사장, 운영위원, 자문위원, 연구위원이다.
朴 변호사는 또 2008년 도서출판 ‘웅진주니어’(발행인 최봉수)가 펴낸 아동도서《호찌민 이야기》에서 ‘호찌민을 향한 베트남의 변함없는 우정’이라는 제목으로 추천사를 쓰면서 베트남 공산화의 원흉인 胡志明(호지명)을 ‘위대한 지도자’로 극찬하기도 했다.
그는 추천사에서 “세기를 넘나들며 호찌민만큼 온 국민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은 지도자는 드물 것”이라며 “베트남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호찌민은 여전히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마음의 연인처럼 간절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호찌민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독립투쟁을 한다는 것에 한없는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면서 호지명(胡志明)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 유명한 동굴 투쟁의 시기에도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비록 그는 사랑하는 조국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사상과 지도력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베트남 국민들을 단결시켜 마침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물리치고 조국의 통일을 이루어 냈다.”
朴 변호사는 국군(國軍)이 베트남전쟁에서 5천여 명의 전사자를 낸 것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호찌민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남겨놓은 불굴의 의지와 정신은 오늘날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베트남의 저력이자 원동력이 되고 있다”면서 적국(敵國)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보였다.
■ 대북관: “10.4선언, 6·15선언 구현하는데 최선 다할 것”
박원순(朴元淳) 변호사는 “(북한은) 동등한 파트너로서 국가의 존재가 사실상 인정되고 있다”면서 북한 주민들에 대한 김정일 정권의 인권유린, 북한 핵(核)무장 등 범죄행위에 대해 침묵해왔다.
朴 변호사는 1999년 8월 참여연대 발간의 월간《참여사회》에서 같은 해 3월 미국을 방문해 칼 거쉬만 NED(全美민주주의기금)회장과의 만남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북한의 경우 워낙 폐쇄적인 사회여서 북한의 민주화나 인권문제에 당장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 대신 점진적인 남북교류와 경제교역의 추진에 따라 신뢰와 화해를 쌓아가는 것만이 북한을 민주화시키는 길일 것이라고 (거쉬만 회장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또 “지난 번 Ms. 코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집요하게 북한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운동을 한다면 재정지원을 할 용의가 있음을 이야기하여 좀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그동안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는 단체와 언론은 대체로 극우보수파(極右保守派)들이었음을 설명했었다”면서 북한인권 문제가 극우보수파(極右保守派)들의 이슈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2008년 2월4일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인터뷰에서는 “북한에 대해서는 정보가 제한돼 있어서 워낙 폐쇄적인 국가니까 (알 수는 없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된 국가에서는 고문이 있을 가능성이 많죠. 어떤 고문이나 권위주의적인 폭압적 통치는 분명히 저는 있을 것이라고 보고요, 그것은 국제사회가 일정하게 개입을 해야죠”라고 말했다.
‘국제사회 (일정한) 개입’을 언급한 부분에서는 북한인권에 대해 기존의 관념에서 부분적으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2008년에는 북한인권이 이미 세계적 이슈로 부각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그의 인식 수준을 進步的(진보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미북(美北)간 협상을 강조해왔다. 朴변호사는 2009년 9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한국 시민운동 방미대표단’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미(美)행정부와 의회 인사들을 만나 ‘능동적 협상만이 비핵·평화를 보장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전달한 바 있다.
반(反)헌법적인 6·15 및 10·4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지난 10월3일 선거캠프 대변인을 통해 “박원순 후보는 남북 간의 상호존중과 신뢰관계를 회복하고, 인도주의적 협력사업을 강화하는 일이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업인 동시에 서울시민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면서 “서울시민들의 선택을 받는다면 시장에게 허락된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10·4선언과 6·15선언에 담긴 민족의 염원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의 약점을 찾는 데는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김정일 독재 정권의 약점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과연 인권변호사가 취해야 할 태도인가? 朴元淳 변호사는 대한민국 변호사인가? 아니면 김정일 정권 변호사인가?
■ 안보관: “천안함 사태, 국민이 믿지 않아”
박원순 변호사는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 사태와 관련, 북한을 적극 옹호했다. 그는 또 노무현 정권도 국가 안보상의 필요성을 인정해 추진했던 제주해군기지 건설문제에 대해 ‘국민주권, 국민의 행복 추구권, 적법절차의 원칙’ 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서 반대했다.
朴변호사는 2010년 9월15일 자신의 홈페이지인 ‘원순닷컴’에 게재한 칼럼(제목: 진리에 가까워지기 위하여)에서 당시 국방부가 ‘천안함 피격사건의 진실’이란 제목의 만화를 천안함 합동조사결과 보고 자리에서 배포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 내용이 결코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표현과 묘사로 일관되어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발표와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해서 ‘한방에 가는 수가 있다’고 협박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과 테러를 암시한 것이고 정부기관이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중략) 이렇게 폭력적이고 야만적으로 대응하고 표현한다는 것이 오히려 국방부의 초조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진실성을 깎아먹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언론사의 발표에 따르면 정부의 발표를 믿는 사람은 겨우 30%가 좀 넘는다고 하는데 국방부의 이러한 비상식적인 태도야 말로 더욱 그 신뢰를 떨어트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朴변호사는 또 2010년 10월14일자 칼럼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믿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라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해 “그것은 과도한 牽强附會(견강부회)”라며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그 국민들을, 아니 다수의 국민들을 김정일 신봉자로 몰아붙이는 태도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중략) 천안함 사태를 초정파적이고 엄정한 과학적인 태도로 조사했다고 국민이 믿지 않는 것은 그 당시 지방선거의 일정에 맞춰 정부여당에 유리한 시기를 골라 발표했다는 강력하고도 합리적인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이 중대한 국가적 문제, 국방상의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朴변호사는 2010년 11월23일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우리 軍의 연평도 사격훈련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북쪽을 자극해서 우리가 얻을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다. 북은 어떤 방식으로든 보복을 할 텐데, 이를 응징하든 못하든 모두 우리 쪽 손해가 아닌가. 한반도 평화가 깨지고 직접적 인명 살상 사태가 벌어지면 누가 봐도 나쁜 일이다. 이는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말한 선서에도 위배된다. 누가 우리를 침공하면 당연히 대응을 해야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런 것도 아니고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朴변호사의 이러한 친북(親北)적이며 반군(反軍)적 성향은 제주해군기지 건설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대로 표출됐다. 그는 2011년 5월31일 제주에서 가진 강연에서 “(제주해군기지 건설이) 충분한 토론을 통하지 않고 추진하였다면 불법임에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은) 국민주권, 국민의 행복추구권, 적법절차의 원칙 세 가지 중 그 어는 것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말한 뒤, “시간이 되면 일주일 정도를 강정에서 지낼 수도 있다”면서 친북․종북․좌파세력을 향해 추파를 던졌다.
朴변호사는 2011년 6월8일 참여연대 등 111개 단체 주도의 ‘제주해군기지 건설 중단을 촉구하는 각계인사 선언’에 박상증(아름다운재단 이사장), 정현백(참여연대 공동대표), 백낙청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명예대표 등의 인사들과 함께 서명에 참여했다.
■ 법치의식: 현행법 어겨가며 '낙천-낙선 운동' 주도
“법(法)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法이 지켜져야 한다면 시대착오적인 法律(법률)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속박할 것이다. 악법(惡法)이 법(法)일 수는 없다.” (2000년 2월16일, 총선연대 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의 ‘검찰소환에 응하는 소감’에서)
1. 박원순 변호사는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12일 참여연대와 환경연합 등 420여개 좌파단체와 함께 ‘2000년 총선 부패정치 청산 시민연대’(이하 총선연대)를 구성, 단체 상임집행위원장 자격으로 不法(불법) 낙천․낙선 운동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선거법 87조는 선거일 20일 전부터 시작된 공식 선거운동기간 중 시민단체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해 놓았다. 따라서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은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지만 총선연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선관위는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불법(不法)행위임을 거듭 경고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검찰은 총선시민연대 지도부에 대한 각 후보 진영의 고소·고발 사건 54건을 접수, 6개월 동안 被(피)고소·고발인 208명에 대한 수사를 벌였고, 2000년 총선연대 간부 29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서울지방법원 민사13부는 2002년 9월26일 이종찬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이 “총선연대가 낙선운동을 벌이며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참정권을 침해했다”면서 朴변호사등 총선연대 간부 4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는 연대해서 원고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2004년 9월21일에는 이사철 前의원이 朴변호사 등 총선연대 간부 5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결과, 대법원이 “총선시민연대는 2,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2. 불법(不法)으로 확인된 낙천·낙선 운동은 2004년 총선에도 계속됐다. 2003년 12월23일 환경연합 등 394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부패정치추방과 정치개혁실현을 위한 비상시국회의준비단’은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회의를 열고 “내년 총선에서 改惡(개악)을 주도한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낙선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이 운동은 이듬해 1월 ‘2004년 총선 물갈이 국민연대’, 같은 해 2월 ‘2004총선시민연대’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2004총선시민연대’는 2월5일 여야 중진의원을 대거 포함한 1차 공천반대자 66명의 명단을 발표, 2000년과 마찬가지로 反좌파 성향의 인물을 걸러냈다. ‘2004총선시민연대’에 참여했던 단체들은 2004년 3월 노무현 탄핵 정국에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청산을 위한 범국민행동(이하 탄핵무효행동)’에 참여, 탄핵에 찬성한 의원을 축출하는 낙천·낙선운동을 전개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최초 ‘2004총선시민연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탄핵무효행동이 구성되자 오종렬·문규현 등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탄핵무효행동의 낙천·낙선운동 역시 불법(不法)이라고 봐야하지만, 노무현 탄핵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무산되면서 有耶無耶(유야무야) 넘어가 버렸다.
朴변호사는 그러나 최근 임태희 대통령 실장이 ‘참여연대’와 ‘아름다운재단’ 등 朴변호사가 주도해온 시민단체 활동과 관련, 그 순수성에 문제를 제기하자 “대통령 실장의 발언이 대통령의 생각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임 실장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했다”면서 “청와대가 선거에 실제 개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케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惡法이 法일 수는 없다’면서 我田引水(아전인수)식의 法해석을 해온 朴변호사 다운 발언이다. 문제는 누가 악법(惡法)인지 선법(善法)인지를 판단하는가이다. 박원순씨는 보안법도 악법이라고 본다. 법치주의를 무시하는 그가 서울시장이 된 다음, 북한공작원과 간첩들이 '악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나올 때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민주국가에서 공인(公人)이 '악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한국에선 서울시장에 출마한다.
■ 국보법 폐지, 利敵(이적)단체 및 친북(親北)인사 비호
박원순 변호사는《국가보안법 연구》, 《야만시대의 기록》등의 저술활동을 통해 국보법 폐지를 주장해왔다. 국보법 폐지와 관련된 그의 주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7조 때문인데 조선일보 주장처럼 광화문 네거리에 ‘김일성 만세’라고 부르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는 헌법에 나와 있는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이를 억압하겠다는 뜻이다.”(2004년 9월24일 <미디어오늘> 인터뷰)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국민생활 전반에 걸친 족쇄였으며 국가의 진취적 발전을 가로막는 쇠사슬이었다.”(《국가보안법 연구》1권, 23페이지)
▲“민주주의는 결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이들 이념을 받아들여 그 사회 속에서 하나의 가치체계로서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서구의 여러 선진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국가보안법 연구》 3권, 178페이지)
▲“소위 利敵(이적)서적에 대한 압수수색의 바람이 불고 있다…(중략) 통일의 진정한 논의는 상호간의 이해에 바탕하며 그것은 북한의 原典(원전)과 북한연구서에 대한 대폭적인 개방이 전제된다…(중략) 기본적으로 어떠한 내용의 서적이든 이를 금압하는 것은 야만적인 짓이며 역사를 암흑으로 이끌 것이다.”(1989년 4월11일자 동아일보)
▲“48년 12월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중략) 이후 두 차례의 개정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 것은 1958년이다. 흔히 말하는 ‘보안법파동’ 인데 제정 당시의 6개 조항이 40개로 대폭 늘어나면서 훨씬 강화됐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 가중되는 위기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간첩이나 북한의 침략에 대해서보다는 야당이나 언론, 곧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취한 조치인 것이다.”(1989년 11월28일자 <동아일보>)
▲“지난 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래 남북관계는 현실적으로는 상호실체를 인정하면서도 법적으로는 상호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순이 심화돼왔다. 국제사회에서 떳떳이 나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1991년 5월31일자 동아일보)
朴변호사는 국보법과 관련된 위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청년단체협의회’(이하 한청)와 같은 利敵(이적)단체를 변호했다. 그는 2002년 11월25일 <한겨레신문> 기고문에서 利敵(이적)단체 한청을 변호하며 “북한이 꼭 같이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모든 주장이 이적(利敵)행위가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미군범죄가 猖獗(창궐)하고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군철수 주장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청년단체협의회와 그 간부들이 실질적으로 국가안보를 危害(위해)한 어떤 행동을 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한청은 2001년 2월11일 창립선언문에서 “우리는 민족의 자주와 민주를 실현하는 정권을 창출하고 마침내 연방통일조국을 건설하는 데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4년 서울중앙지법은 한청을 이적(利敵)단체로 판시하며 “한청의 강령이나 소식지는 남한 사회를 美제국주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있고, 북한의 先軍(선군)정치를 찬양하면서 주한미군 철수, 인민민주주의 혁명 등을 주장하고 있어 공소사실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도 2009년 2월 “한청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와 마찬가지로 북한 革命(혁명)노선과 궤를 같이해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위험성이 있는 이적단체”라고 판시해 朴 변호사의 주장을 부정했다.
朴변호사는 2003년 8월7일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이하 범국민추진위)에 강정구 前동국대 교수, 오종렬․한상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등의 인사들과 함께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당시 범국민추진위는 이적(利敵)단체 한통련 의장 곽동의, 동백림 간첩단 사건 연루자 이수자(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在獨(재독)학자 송두율 등 해외 친북(親北)인사를 ‘해외 민주인사’로 부르며, 이들의 귀국을 추진했었다.
朴변호사는 또 2009년 2월9일 ‘희망제작소’ 홈페이지에 게재한 칼럼에서 文益煥(문익환) 목사에 대해 “성경학자, 교수로서 오래 지내다가 인생 후반에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여 80년대 절망의 시대에 민주화와 인권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다했던 분”으로 평가했다.
文목사는 1989년 密入北(밀입북)해 평양 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대한민국 대표자 자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과 ‘통일3단계방안 원칙’에 합의했다. 文목사는 ‘反국가단체잠입죄’ 등 국보법 위반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투옥됐던 인물로 이적(利敵)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 반(反)기업정서: 대기업 비판하며 ‘포스코(POSCO) 사외이사’ 맡아
“현대․삼성․LG․대우 등 4대 재벌그룹의 부가가치 창출액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5년 6%, 1990년 6.6%, 1995년에는 9.2%로 급증했다…(중략) 재벌이 국민총생산의 엄청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은 경제력 집중과 독점, 불공정거래, 빈부격차 등 숱한 국민경제의 왜곡을 낳는다.” (박원순 著, 《악법(惡法)은 법(法)이 아니다》37페이지)
박원순 변호사는 1995년~2002년까지 사무처장 자격으로 ‘참여연대’를 이끌었다. 불법적인 국가 권력 횡포와 재벌 중심의 경제운용을 시민의 ‘참여’로 제어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고 있는 朴변호사의 행적은 그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朴변호사는 2004년 3월부터 2009년 2월까지 ‘포스코’(POSCO) 사외이사를, 2003년 3월부터 2011년 9월 초 까지 ‘풀무원홀딩스’ 사외이사를 지냈다.
그는 5년여간 포스코 사외이사를 지내며 총 37차례 열린 이사회에 29차례 참석했다. 보수는 ▲2004년 4200만 원 ▲2005년 4600만 원 ▲2006년 4800만 원 ▲2007년 5520만 원 ▲2008년 5400만 원 ▲2009년 1억1180만 원으로 파악됐다. 총 3억5700만 원이다. (인터넷판 <동아일보> 2011년 9월24일자 보도 인용)
朴변호사가 ‘풀무원홀딩스’ 사외이사를 지낸 8년 6개월여 동안 받은 보수는 직접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2010년 ‘풀무원홀딩스’의 사외이사 보수 지급 총액은 7200만 원으로 1인당 평균 2400만 원인 것으로 되어 있다.
최근 무소속의 강용석 의원은 朴변호사 주도의 ‘아름다운재단’ 및 ‘참여연대’ 기금운용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했다. 강 의원은 1998~2003년 기간 동안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박 변호사와 함께 대기업 지배구조 문제를 비판했던 인물이다.
강 의원에 따르면 ‘참여연대’가 비판한 50여개 기업 중 11개가 2001~2010년 ‘아름다운재단’에 총 150억 3746만원을 기부했다. 기부금액 규모로는 ▲태평양이 96억 9170만원으로 가장 많았으며 ▲교보생명 47억 669만원 ▲신한금융지주 9억 5096만원 ▲포스코(POSCO) 8억 9651만원 ▲LG생활건강 8억 9408만원 ▲대덕 테크노벨리(한화 계열사) 10억 64만원 ▲현대모비스 8억 292만원 순이다. 그러나 이처럼 대기업의 엄청난 후원을 받은 박 변호사 주도의 ‘아름다운재단’은 다양한 명칭의 프로그램을 통해 좌파성향 시민단체들을 지원했다.
일명 ‘개미스폰서’라는 ‘아름다운재단’의 기부프로그램을 통해 지원받은 단체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2007년 11월 동성애자인권연대(성소수자 가족을 위한 정보제공 및 지원체계 만들기),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버마 민주화를 위한 아시아 연대활동) ▲2008년 5월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주한미군기지환경피해공동보고서 제작과 발표, 253만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시민단체 활동가교육, 300만원) ▲2008년 8월 함께하는 시민행동(정책포럼 ‘촛불 이후의 사회운동’, 300만원) ▲2008년 10월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NGO 활동가를 위한 정신건강 검진 프로그램, 300만원) ▲2008년 11월 새사회연대(과거청산유족·피해자 열린 인권학교 : 유족·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함. 300만원) ▲2008년 12월 천주교인권위원회(제1회 가톨릭청소년 인권캠프, 300만원) ▲2009년 3월 (사)환경정의(저소득가구 밀집지역 환경복지 실태조사, 300만원), 참여연대(지역사회 대안 만들기 위한 활동가 학습커뮤니티, 300만원), 경기복지시민연대(자료집 제작, 300만원)
위에 열거된 단체는 대개 ▲국보법폐지국민연대 ▲2003년 이라크파병반대비상행동 ▲2004년 탄핵무효범국민행동 ▲2005년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대위 ▲2008년 광우병사태를 주도한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등 각종 범대위(연합체) 참여 단체들이다.
대기업 CEO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시절 ‘아름다운재단’에 자신의 월급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당시 李시장의 월급은 제세공과금을 제외하고 500만원이었다. 이 금액은 매달 李시장의 우리은행 계좌를 통해 ‘아름다운재단’의 ‘등불기금’으로 자동 이체됐다.
■ 강남에서 살면서 思考(사고)는 좌파적(左派的)으로 하는 ‘강남좌파’
“아파트의 전세금이나 고향에 부모님들이 물려주신 조그만 땅이 있으니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자위하지만 그래도 장래 우리 아이들의 결혼 비용이나 교육비에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 사실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는구려. 그러나 우리가 그랬듯 살아가는 동안 겪는 어려움과 고난은 오히려 우리 아이들을 더욱더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 것이니 모든 것은 운명에 맡겨 두는 것이 좋을 듯하오” (박원순 변호사가 2002년 미리 작성한 유서 내용)
1. ‘서민’을 표방한다는 박원순 변호사는 현재 강남구 방배동 L아파트(61평형)에 전세를 살고 있다. 이와 관련, 朴변호사 측은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250만원을 주고 살고 있다”면서 “하버드 대학 등에서 유학을 할 때 가져온 자료가 1트럭 분량인데 자료를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2008년 (넓은 평형으로) 이사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朴변호사가 매달 월세로 내고 있는 250만원은 서민들의 한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2. 朴변호사의 부인 강난희씨는 1999년 설립한 인테리어 업체가 일부 대기업으로부터 공사를 집중적으로 수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일례로 강 씨의 회사는 설립이후 3년간 현대모비스에서 10건의 공사를 수주했다. 현대모비스는 朴변호사가 주도했던 ‘아름다운재단’에 교통사고 유자녀의 학자금 지원용도로 2003년부터 총 5억7000만원을 후원하기도 했다.이에 대해 朴변호사측은 “‘아름다운가계’ 130여개 매장 중 초창기 18개 매장의 공사를 맡았는데 당시 이익이 박하고 결제조건이 열악해 디자인업체에는 폭탄이나 다름없는 것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떠맡았다”고 설명했다. 현대모비스 수주 건에 대해서는 “朴후보와 무관하게 이뤄진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론은 “대기업 때리기에 열중해온 朴후보와 아내 회사가 무관할리 없다”면서 의혹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실제로 강 씨의 회사 ‘P&P design’의 현대모비스 관련 시공 사업권 수주는 신생업체로서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이와 관련, <빅뉴스>는 최근 취업사이트 <잡코리아>자료를 인용해 ‘P&P design’ 사업권 수주 실적을 공개했다. 문제의 회사는 ▲2000년도 ‘현대 모비스 본사 사옥 이전 설계/시공’, ‘현대 모비스 전국 기아 프론트 개선공사 설계/시공’, ‘용인 현대 모비스 연구소 A동 설계’ 등의 사업권을 따냈으며, 2002년도에는 ‘현대모비스 원효로 현대북부사업소 설계/시공’, ‘현대모비스 농구단 숙소 설계/시공’, ‘현대모비스 수원 현대사업소 설계/시공’ 등등 더 큰 사업권을 확보했다. ▲2003년도와 2004년도에도 ‘현대모비스 연수원 설계’, ‘현대모비스 전차 시험동 설계’, ‘전국 현대 모비스 부품 대림점 이미지월 공사’, ‘현대모비스 사장실 설계 및 시공’ 등등의 사업을 도맡아왔다. 현대모비스와 같은 대기업이 창업한 지 1년도 안 되는 회사에 큰 규모의 설계 및 시공 사업권을 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3. 朴변호사의 딸은 서울대를 졸업한 뒤 현재 스위스 제네바대학에서 인권법 관련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어떻게 딸을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싸다는 스위스로 유학을 보낼 수 있느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朴변호사는 “‘윌스도르프재단’(WILSDORF foundation)이 학교에 돈을 주고 학교가 학생을 선정하는 방식”이라면서 “그 장학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했다. ‘윌스도르프재단’은 스위스의 고가 명풍 시계 브랜드인 ‘롤렉스’社(사)를 설립한 한스 윌스도르프(Hans Wilsdorf)를 기려 설립됐다. (조갑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