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짧은 탈출기는 '배낭여행' 정도

    脫北스토리 연재 후 많은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런 엄청난 고생과 위험을 겪었을지 몰랐다며 어떤 분은 통화 과정에 울기도 하셨다. 그 분들에게 나는 2만 명의 탈북자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니 어쩌면 난 남들에 비해 덜 고생하며 탈북한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북한에서부터 갖고 나온 달러에 기댈 수라도 있었고, 창용아저씨, 신광용씨, 왕초린과 같은 평생 못잊을 은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굶주림이란 거지처럼 거리에서 동냥을 한 번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고, 1월의 산 속에서 추위에 떤 날도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사관에 들어갈 때까지 중국 땅에서의 방황도 남들처럼 수년 세월이 아니라 2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산 속에서 몇 년을 토굴생활 하다가 온 탈북자들,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살아 온 그 기막힌 운명들을 글로 옮겼다면 아마 나의 탈출기는 배낭여행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필사의 탈북 드라마…드라마…드라마…

    그들의 곡절 많은 탈북여정을 어떻게 다 그려낼 수 있겠는가. 탈북자동지회 홍순경 회장님은 태국에서 북한 보위부에 납치되어 실려 가는 과정에 불행 중 다행의 차 사고로 현지경찰에 망명을 요구할 수 있었다.

    자유북한방송국 김성민 국장은 쇠고랑을 찬 채로 달리는 북한열차에서 뛰어내려 자유의 소원을 두 손에 꼭 모아 쥐고 무릎걸음으로 얼어붙은 두만강을 기어서 넘었다. 우리의 탈북은 한 목숨만으로도 부족한 것이기도 하였다. 탈북자 구출센터 백명학 소장은 세 번이나 北送(북송)됐다 세 번 탈출하여 대한민국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조선일보 강철환 기자는 노예 같은 북한공민의 권리조차 없었기에 인권을 찾아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사람이다. 

    이렇게 온 우리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탈북자라고 한다. 그러나 탈북자란 그 이름마저 갖지 못한 채 이국땅을 방황하다 숨진 이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메콩강의 급류 속에서 튜브 하나에 가족의 운명을 실었다가 아이만 살려 보낸 한 부부의 비극도 있고, 영사관 진입 도중 공안들이 달려들어 눈앞에서 생이별한 눈물의 母女(모녀)도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부르짖고 싶다

    탈북!  말은 이렇듯 북한체제의 탈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할 때 이미 생명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목숨의 탈출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인류가 말할 수 있는 모든 비극이 가슴에 응축되어 피멍든 그들,  각자 최소한 이별의 아픔이라도 부여안고 모대기는 그들이 바로 우리 2만 명의 탈북자들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부르짖고 싶다. 당신들에겐 그냥 태어난 대한민국이지만 우리 탈북자들에겐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오지 않으면 안되는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정녕 조국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에게 엎드려 큰 절을 드리고 싶다. 내 조국 반쪽이라도 이렇듯 자유의 땅! 민주의 땅! 선진화의 땅으로 만들어주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도 사람의 것이라고 기어이 살아서 가리라! 외치며 사생결단 찾아올 수 있었다. 

    삶이 없던 그 땅에선 이별의 권리도 없었기에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대한민국 흙 한 줌도 보듬고 싶을 만큼 이 땅이 고마워서 울고, 그래서 북한에 두고 온 그리운 얼굴들 때문에 또 운다. 이별은 떠나는 마음보다 보내는 마음이 더 아프다 했지만 살아도 삶이 없던 그 땅에선 이별의 권리마저 없었기에 그 아픔마저 주지 못한 나는 이별의 죄인이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우리 탈북자들 모두가 아직도 탈북하지 못한 가슴 반쪽을 부여잡고 좋은 음식이면 좋은 음식에 목이 메어 울고, 설날이면 또 가는 한 세월에 울고 있다.

    분단의 철책선이 땅에만 아니라 그렇듯 생살까지 찢으며 가로 지른 그 수난자들이 바로 우리 탈북자들이다. 

    독재와의 전쟁… 땅에 묻은 사람들의 복수

    이 수기를 쓰는 며칠 동안에도 나는 5년 동안 겨우 잠재웠던 악몽에 또 다시 시달려야 했다. 두만강을 넘다가 총에 맞기도 했고, 창용아저씨 장모집 옆 빈농가에 숨어있다 불쑥 나타났던 공안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친구가 공안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날 살리려고 벼랑에서 뛰어내린 꿈을 꾼 날에는 한 밤중에 일어나 앉아 소리내어 울기도 했다. 북한 땅에서 어떻게 살았던가 싶을 만큼 기억만으로도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악몽만으로도 숨 가쁜 생사에 가슴조려야 하는 탈북자가 어디 나뿐이랴. 

    그렇다. 우리 탈북자들은 결코 북한체제를 탈출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의 탈북은 땅에 묻은 사람들의 복수였으며 독재 권력과 인간과의 치열한 전쟁이었으며 살아서 온 인간의 승리였다. 

    심양의 왕초린을 찾고 싶다

    나는 이 수기를 마치며 소원하건대 심양의 왕초린을 찾고 싶다. 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이유 중 하나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쯤 대상, 아니 남편이 되었을 그 친구와 결혼도 하고 어느덧 애들도 가졌을 것이다. 어느 날 불쑥 연락이 와서 친구처럼, 아니 친척처럼 소식을 주고받고 내왕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공상을 해 본다. 

    영사관에 들어가면 신광용에게 전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초린이에게 내 소식도 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의 보호를 위해 허락해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졸라 마침내 나 대신 다른 분이 연락을 넣어 봤지만 그때 신광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후에 주민등록증을 받아 대한민국 국민이 된 날 창용 아저씨를 통해 바뀐 광용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지금도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광용은 초린이 삼촌 집 전화번호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현재 광용은 탈북자인 청진 여자와 함께 서울 노원구에서 살고 있다. 예쁜 엄마를 닮은 아들도 있다. 

    조선족과 연대, 김정일 포위망을 단단히

    창용아저씨는 우리가 준 700달러로 견인기 대신 소 한 마리와 가전제품을 샀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니 조선족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솔직히 그들이 없다면 오늘날 2만 명의 탈북자도 없다고 본다. 비록 사회주의 중국에서 살고 있지만 민족적 동정심과 인간의 양심으로 김정일 정권에 침을 뱉는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탈북자들에겐 숨어있을 은신처와 얻어먹을 만두가 있고 탈출의 방법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정일은 민족의 포위망에 든 셈이다. 

    분단의 38선 너머에는 자유민주주의 국민이 있고 내부에는 주민들의 분노가 있다. 북쪽에는 김정일을 민족의 수치로 생각하는 우리 조선족 사람들이 탈북자의 탈출을 도와주고 있다. 그들은 중국에선 소수민족일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에는 민족과 영토의 유구한 역사와 그 가치의 대를 잇고 증명하는 大민족이라고 본다.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 탈북자들이 그들에게 감사하고 단체 차원에서 연대활동도 벌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더 많은 탈북자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절실히 필요하고 그들이 우리의 예의와 도리에 감동하여 탈북자들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조선족 사람들이 親韓정서를 가질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여 김정일 정권을 더욱 고립시켜야 한다. 또 그것이 북한체제 붕괴에 대비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며 궁극적인 통일의 위업이라고 본다. 

    김정일과 나의 차이

    나는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는 이 수기를 볼 북한 통전부 친구들에게 나의 오늘을 자신있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밥 한 줌에 생명을 느끼고 산 속에서 추위에 떨며 날을 새던 도피자가 더는 아니다. 못 알아들을 중국말에 멸시받고, 개처럼 쫓기고 밥 한줌 값도 안 되는 동전을 소원하던 김정일 정권의 주민이 아니다.

    나는 현재 국책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한다. 대학 강의도 나가고 내 손으로 쓴 책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와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를 누구의 간섭이 없이 출판할 수도 있었다. 한 달 전엔 서울 친구들도 부러워 할 새 아파트도 가졌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고마운 어르신들의 존함을 여기에 적는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이렇듯 충성으로 바치는 삶이 아니라 성취로 가지는 삶을 살고 있으며 민주적인 선거권으로 대통령을 결정할 수도 있다. 나는 내 목숨이 소중하고 내 삶이 이렇듯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처음 느꼈다. 

    김정일은 자기에겐 불가능이란 없다고 했다. 그 불가능이란 정권도 총에서 나온다고 말할 줄 아는 독재자의 파렴치하고도 타락한 가능이다. 그러나 나에겐 인간으로서의 불가능이란 없다. 나는 이미 저 북한에서, 그리고 한국으로 찾아오는 험난한 길에서 극도의 공포도 체험해 보았고, 외로워 보았고, 슬퍼 보았고, 친구를 잃은 상실의 아픔도 느꼈다. 나에겐 이젠 더 이상의 아픔이란 있을 수가 없다. 이제 또 어려운 일에 부닥칠지라도 지금껏 겪었던 그 모든 좌절과 비극에 절대 비할 수는 없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며 백 번이라도 다시 일어날 용기가 혈맥에 가득 차 넘친다. 대한민국에서 나에겐 행복할 권리와 성공의 의무만 있으며 또 그것을 위해 열심히 살 앞날만 남았다. 그 모든 것을 바칠 평생의 반려자를 찾아 새 가정도 예쁘게 만들기도 하리라. 이것이 바로 자기에겐 불가능이란 없다는 독재자 김정일과 전혀 다른 나의 무궁무진한 인간의 가능이다. 

    그동안 저의 글을 보아주신 여러분께, 그리고 저의 탈북스토리를 특별히 배너로 만들어 소개해준 뉴데일리, 조갑제닷컴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