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⑤

     내 영어 습득(習得)은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영어를 가르친 노블 목사가 제중원(濟衆院)의 여의사 조지아나 화이팅을 소개 해주었다.
    「조선말을 가르치고 보수를 받으시오.」
    노블이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가르치는 동안에 미스터리의 영어 실력도 더 향상이 될것이오.」

    과연 그랬다.
    서로 열의가 있다보니 조선말과 영어를 섞어 쓰면서 대화를 했는데 점점 내 영어를 쓰는 비율이 높아졌으며 화이팅은 조선말이 늘어났다.
    그래서 한달이 되던날, 공부를 마쳤을 때 화이팅이 나에게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리, 수업료 받으세요.」
    「나도 영어를 배웠는데 수업료를 받을 수가 있습니까?」
    했지만 나는 봉투를 받았다.
    「펴 보세요.」

    화이팅이 말하길래 내용물을 꺼내 보았더니 20불이나 들어있는 것이다.
    배재학당 교사들의 봉급이 20불이었으니 나도 같은 금액을 받은 셈이다.
    「너무 많습니다.」
    놀란 내가 말했을 때 화이팅이 얼굴을 펴고 웃는다.
    「리는 훌륭한 교사예요, 그만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영어와 조선어가 반쯤 섞인 말이었지만 내 심금을 울렸다.
    순간 기뻐하실 어머니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그 다음이 아버지, 그리고 아내로 이어진다.
    20불은 거금이나, 우리 식구가 다섯달 먹을 양식을 살수가 있다.
    나는 그야말로 나는 듯이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이경선은 평생 돈을 벌어 보신 적이 없는 양반이다.
    술과 친구를 좋아해서 자주 집을 비웠는데 가족의 생계는 전적으로 어머니께 맡겼다.
    지금까지 어머니가 겪은 고생은 필설로 다 표현하지 못한다.
    내가 과거에 매달렸던 이유 중의 하나로 어머니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었다는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리라, 과연 어머니는 내가 내놓은 돈을 보더니 우셨다.
    그러나 곧 눈물을 닦더니 나를 똑바로 보았다.

    「아가, 이 돈, 네가 천주학을 믿어서 받은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어머니.」
    쓴웃음을 지은 내가 머리를 저었다.
    어머니 뒤에 엉거주춤 선 아내가 두려운 시선으로 방바닥에 놓인 달라를 본다.
    아마 처음 보았으리라.

    「제가 제중원 의사한테 조선말을 가르치고 받은 돈입니다.」
    「아버지가 오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꼬.」
    다시 눈물이 글썽해진 어머니가 닷새째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는다.

    작년에 과거가 폐지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보다도 더 낙망하셨다.
    본인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식대에 이루려고 기를 썼던 아버지다.
    조선 땅이 개화와 수구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었고 외세의 압박과 난리가 일어난 상황에도 아버지는 내 과거에 집착했던 것이다.

    방을 나온 나는 마루에 서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본다.
    오늘은 날이 맑아서 석양은 선명하게 붉었지만 그것이 더 머릿속을 심란하게 만든다.
    신학문을 공부할수록 내 견문은 넓어지는 한편으로 현실과의 괴리에 더욱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에 배운 민주주의 원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이다.
    빈부(貧富), 귀천(貴賤) 구분이 없는 세상,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세상이다.
    내가 그래서 학당에 들어왔지 않은가?
    다 버리고 들어온 것이다.
    선홍색 하늘이 회색빛으로 덮여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문득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열기를 느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리라.
    우선 당장은 열심히 살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