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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기자가 편집인에게 취재원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한 게 중대한 실수였다."
1981년 '지미의 세계(Jimmy’s World)'라는 희대의 허위조작 기사의 진상을 파헤쳤던 옴부즈맨 빌 그린(Bill Green)은 당시 워싱턴포스트에 게재한 3페이지 짜리 경위 보고서에서 "담당 기자가 에디터에게 취재원을 밝혀 기사에 대한 신뢰성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 기사는 절대로 보도돼서는 안된다"는 유명한 조언을 남겼다.
워싱턴포스트의 1년차 기자였던 재닛 쿠크(Janet Cooke)는 1980년 9월 28일 자사 1면에 '지미의 세계(Jimmy’s World)'라는 현장 르포 기사를 올려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헤로인에 중독된 8세 소년 지미의 안타까운 사연은 미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놨고, 이 공로로 재닛 쿠크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날조된 허위 기사였다. 특종 욕심에 존재하지도 않는 지미를 등장시켜 가상의 기사를 쓴 재닛 쿠크는 취재원의 신분을 보호해야한다는 명목으로 자사 데스크들에게까지 지미의 신분을 감췄다.
나중에 재닛 쿠크 스스로 기사 내용이 허위라는 사실을 인정, 퓰리처상을 반납하면서 마무리된 이 사건은 팩트체킹(Fact Checking)이야말로 저널리즘에서 가장 우선시돼야하는 필수 항목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대표적인 케이스로 남게 됐다. -
새해 벽두 방송한 '시민 인터뷰'..알고보니 죄다 아는 사이?
MBC뉴스데스크는 지난 1일 '개헌 어디까지 왔나'라는 제목의 뉴스를 보도하며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본다는 취지로 대학생과 회사원, 공무원 등 일반 시민 6명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이들은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 되고 있는 '개헌'과 관련해 각자의 입장에서 이러이러한 점들이 새 헌법에 담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인터뷰이(interviewee)들의 나이와 성별, 직종 등을 감안할 때 리포트를 작성한 기자가 나름 형평성과 대표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방송 직후 이상한 얘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24살 대학생으로만 소개됐던 한 여성이 '엠빅뉴스'라는 MBC의 또 다른 컨텐츠에 등장했던 인턴기자로 보인다는 얘기였다.
확인 결과 이같은 루머는 사실이었다. 이날 뉴스 인터뷰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폐해를 인식했다는 소견을 밝힌 여성은 지난해 12월 7일 "최승호 사장님, 왜 우린 사원증 목걸이가 달라요?"라는 제목의 엠빅뉴스에 출연했던 인턴기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해당 리포트를 작성·보도한 N모 기자와 해당 여성이 지난해까지 같은 부서(뉴미디어 뉴스국)에서 함께 일을 했던 사이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N기자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전 인턴기자를 섭외, 마치 거리에서 캐스팅한 '일반 시민'처럼 포장해 내보냈다는 얘기다.
놀라운 사실은 또 있었다. 해당 리포트에 등장한 35살의 회사원과 24살의 여학생 모두, N기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로 밝혀진 것이다. 두 번째로 인터뷰에 응한 여학생은 앞서 거론한 전 인턴기자와 같은 대학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이날 인터뷰에서 노동자의 권한 강화를 주장했던 35살 회사원은 N기자가 대학시절 3년간 룸메이트로 지냈던 친구로 밝혀졌다. 또한 '헌법 제36조1항의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개정해야한다'는 얘기를 꺼낸 26살 남학생은 일반 학생이 아니라 특정 정당 소속의 청년 정치인이었다. 비록 N기자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지만,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을 '평범한 학생'으로만 소개한 것 역시, 해당 리포트의 공정성을 의심케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문제의 리포트를 작성한 N기자는 지나치게 친분 관계에 있는 사람들로 인터뷰이 선정이 이뤄졌다는 지적이 일자, "개헌에 대한 대학생들의 입장을 듣기 위해 전 인턴기자에게 추천을 받아 진행했다"고 말한 뒤 "학생 신분으로 돌아간 전 인턴기자에게 (충분히)의견을 들어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
조선일보 윤리규범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해 관계의 갈등 상황을 피하기 위해 기자들은 친·인척, 사적 친분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집단과 관련된 취재 보도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비록 해당 분야의 전문가일지라도 그 사람이 기자와 친분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해 글을 쓰거나 발언을 인용해서는 안 되며 예외가 발생할 경우 이해 관계와 무관함을 명확하게 입증해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물론 이 가이드라인은 신문사에서 작성된 것이지만 방송기자라고 예외가 될 순 없다. 설명 N기자의 말대로 해당 리포트에 등장한 인터뷰이들이 나름 전문성이나 대표성을 띠고 있다고 해도 조선일보 가이드라인처럼 이해 관계와 무관하다는 점이 반드시 입증돼야 한다. 취재원과 해당 기자가 사적 연고를 매개로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오해를 피하려면 적어도 취재원의 신분 일부는 밝혔여야 함이 옳다. 하지만 해당 리포트에 등장한 인터뷰이들은 모두 평범한 회사원과 학생들로만 소개됐다.
시청자들 입장에선 이들의 주장을 일반 시민들의 순수한 의견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럴리는 없겠지만, N기자가 사전에 인터뷰이들을 만나 특정 입장을 대변해달라는 주문을 했다면? MBC뉴스 혹은 N기자가 특정 목적을 위해 시민 인터뷰를 조작했다는 불순한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석연찮은 점은 또 있다. 지난해 12월 9일 전자 담뱃값 인상 문제를 다룬 MBC뉴스데스크 리포트에서 전자담배 흡연가로 등장한 남성이 자사 보도국 직원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해당 인터뷰에서 "연초 담배보다 더 비싸진다고 하니, 기기까지 사서 피우는 메리트(장점)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던 남성은 MBC 보도국에서 '오디오맨'으로 활동하는 용역 직원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접한 방송기자 출신 인사는 "이건 마치 화재 현장에 나간 기자가, 회사 차량 운전자를 '목격자'로 간주해 인터뷰를 딴 거나 마찬가지"라며 "전설 같은 이야기였는데 실제로 방송기자가 오디오맨을 인터뷰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MBC뉴스는 지금 변화의 길목에 서 있다. 지난해 12월 7일 피디 출신 최승호 사장이 선임된 이후 같은달 13일 이뤄진 국장·부국장 인사에서도 노조 출신 인사들이 중용되는 등, 대대적인 인사 개편이 단행된 상황이다. 최승호 사장은 신임 사장으로 내정되기 전, '현 정부에 너무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나는 저널리스트이고 저널리즘은 기계적 중립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일까? 최근 MBC뉴스의 색깔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스타일이나 주관이 뚜렷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공영방송 뉴스가 편향적인 색깔을 띄어선 곤란하다. 논란이 된 새해 벽두 시민 인터뷰도 개헌에 찬성하는 목소리들만 반영됐을 뿐,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들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기자의 사적 친분 관계를 동원한 인터뷰이 섭외 배경엔 어쩌면 이처럼 달라진 '사내 분위기'가 한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MBC PD협회장은 자신의 SNS에 친분이 있는 한 지인을 인터뷰이로 등장시킨 MBC뉴스를 거론, '아는 사람 띄워주기' '전파의 사적 농단'이라고 비난을 퍼부은 바 있다. 하지만 전직 인턴기자와 현직 보도국 직원을 '시민'으로 둔갑시킨 인터뷰에 대해선 지금까지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
MBC뉴스데스크는 지난 2일 정규 뉴스 시간을 통해 특정 기자의 지인이나 자사 직원을 '일반 시민'처럼 인터뷰해 방송한 것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날 박성호 앵커는 "기자가 자신의 지인을 섭외해 일반 시민 인터뷰로 방송한 것은 여론을 왜곡할 우려가 있는 보도 행태이자 취재윤리를 명백히 위반한 행위"라고 밝힌 뒤 "비슷한 사례가 더 있는지 조사해보니, 또 다른 기자는 (지난해)12월 9일 전자담배 값 인상 여파를 전하는 리포트에서 전자담배를 피는 본사 직원에게 인상에 대한 소감을 인터뷰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자인했다.
"저희 자체 조사 결과로는 해당 기자들이 인터뷰 도중 특정한 내용의 발언을 유도하거나 부탁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힌 박 앵커는 "그러나 저희는 보다 객관적이고 명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방송학회에 경위 조사를 의뢰했다"면서 "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본사 홈페이지에 모든 내용을 공지하고 그에 따른 엄격한 후속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늦게나마 MBC뉴스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 이를 바로 잡겠다고 밝힌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제 3자인 한국방송학회에 경위 조사를 맡긴 것도 현명한 처사라고 본다. 그러나 지난해 말 새롭게 정비된 뉴스데스크가 1주일 새 3차례나 사과방송을 했다는 점에선 심각한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72일간의 파업을 마치고 복귀한 MBC 사원들은 '방송 정상화'를 기치로 내걸고 프로그램 제작에 임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최근 '소방관이 우왕좌왕했다'는 보도나 '임종석 비서실장의 중동행' 보도 등을 보면, 전반적으로 성급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촛불여론'을 등에 업고 '뉴페이스'로 진영이 꾸려진 만큼 단기간에 성과를 일궈내려는 심정은 이해하나, 지금과 같은 식이면 곤란하다. 특종 보도에 앞서, 사실 확인이나 공정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 다른 언론사도 아닌,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해온 MBC 아니던가?
지난 2일 최승호 신임 사장은 "좋은 뉴스와 시사 교양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의 신뢰를 받아야 MBC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회복되고 드라마, 예능, 라디오 프로그램들도 시청자의 사랑을 더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불편부당, 공정성, 진실 같은 화두를 놓치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MBC가 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MBC를 망쳤던 사람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겠다"며 노사 공동의 MBC 재건 정상화 위원회와 감사국에서 진행하는 청산 작업에 역점을 두겠다는 각오는 일견, 섬찟한 느낌마저 준다. 박성호 앵커의 각오가 공염불에 그치지 않으려면, '청산'보다는 '공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수단보다 목적이 우선시 될 경우 지금과 같은 전철을 또 밟을 수 있다. 사후약방문식 대처는 이번 한 번만으로 족하다.
[사진 제공 = 픽사베이(https://pixabay.com) / 뉴시스DB / MBC 방송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