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건국사》 (96) 공식방미 통일투쟁 ①
“가고 싶으나 결정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방미초청설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7월4일 이렇게 답하였다.”작년 덜레스 국무장관과 로버트슨 국무차관보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들을 통하여 내가 미국을 방문하여주었으면 하는 그의 개인적 의사를
《이승만 건국사》 (95) 제네바 정치회담 - B
죽은 스탈린의 망령이 제네바에 나타났다. 정치회담을 덮친 음흉한 약탈자!판문점 휴전에 소련은 안달이 났다. 휴전협정에 한반도통일 논의를 위한 정치회담을 개최한다는 조항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크렘린은 미국에 매달려 졸랐다. 규정에 따르면 ‘전쟁당사국’이 아닌 소
《이승만 건국사》(94) 제네바 정치회담 - A
이럴 줄 알았다. ‘염불보다 잿밥’이라더니 미국이 그 꼴이다.휴전협정이란 목적을 달성하고 나자 미국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정치회담은 잊어버린 것인가.덜레스가 철석같이 약속한 평화통일 협상이 ‘휴전협정 규정 3개월 시한’이 다가오는데도 회담을 시작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승만 건국사》(93) 한미동맹 ③
「...요즘 이승만 대통령은 기분이 저조한(down) 상태이다. 협상에서 너무 양보하지 않았는지, 다가오는 정치회담에서 한국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지 걱정하고 있다...」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는 휴전협정 조인후의 이
《이승만 건국사》(92) 한미동맹 ②
숨죽인 세계가 주목했던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경무대회담이 고비를 넘자 판문점의 휴전 협상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소(小)휴전회담‘으로 불리던 이승만의 휴전협상이 돌파구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잠잠하던 전선에선 중공군이 물밀 듯이 쇄도하였다. 휴전이 임박하자
<이승만 건국사> (91) 한미동맹 ①
”나의 일생은 고독한 투쟁의 연속이었다“지난해 7월 부산 정치파동이 끝났을 때 이승만이 회고한 말이다.24세 청년시절 한성감옥에서 6년간, 미국 유학에서 5년간, 하와이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미국 전역에서 사사건건 사면초가 혼자만의 투쟁 30여년, 공산당은 물론
<이승만 건국사> (90)
6월8일 포로송환협정을 서명하러 도쿄에서 날아오는 클라크는 옆자리 최덕신을 돌아보았다.“제너럴 최, 비행기에서 내리면 기자들이 달려들 텐데 당신은 아무 말도 하면 안되요. 내가 직접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설명드릴 것이오” 클라크의 말을 듣는 최덕신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
<이승만 건국사> (89)
“침략 원흉이 급살 맞았다니 원한 풀어야겠다”“통일 방해자가 사라졌으니 드디어 통일의 날 온다”“전쟁 곧 끝나겠네, 단독북진 내 고향 찾으러 가자” 스탈린의 죽음은 통일을 기다리는 일반 국민도 정치인들도 참호 속의 군인들까지도 춤추게 만들었다.어찌 한국뿐이랴.
<이승만 건국사> (88)
아이젠하워가 한국에 왔다.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당선자‘ 자격이다.1952년도 저무는 12월2일 저녁 7시57분, 영하12도의 찬바람이 부는 수원 공군기지에 미공군 4발기 2대가 착륙한다. 최고 극비의 방문이므로 환영객도 없고 기자들도 수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