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1> 38선을 깨라! 북진하라!

    13장 6.25  (20)  맥아더가 잘 보았다. 서울을 수복한 것은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의 저항이 심했기 때문에 9월 15일 인천에 상륙 하고나서 2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9월 30일, 내가 부산경무대로 참모총장 정일권과 막료들을 불렀다. 일선 사단장

    2011-06-23
  • <410> 적의 허를 찌르다-인천상륙

    13장 6.25 (19)전쟁을 시작한 것도 공산당 무리요, 학살을 시작한 것도 공산당이다. 피는 피를 부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전쟁이 끝나고 부역자와 학살을 자행한 빨치산들에 대한 국군의 보복을 과장한 무리가 있다.이것이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증거도

    2011-06-22
  • <409> 죽창 곡괭이 도끼로 학살

    13장 6.25 (18)신병 훈련소에서 장병을 격려하고 차로 돌아왔을 때 영수, 민옥 두 남매는 경호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동안 경호 경찰이 밥을 먹였고 대충 씻겼기 때문에 사람 모양새가 났다. 아이들을 들여다보는 나에게 경호경찰 하나가 말했

    2011-06-21
  • <408> 쉬다니, 죽는게 낫지

    13장 6.25 ⑰   1950년 7월과 8월의 두 달은 내 인생에서 가장 분주했던 나날이었다. 지금도 그 두 달간을 떠올리면 지난 수십 년 세월보다 더 많은 영상이 지나간다.「각하, 오늘은 쉬시지요.」하고 이철상이 말했을 때는 7월 하순 쯤 되었다. 나는 다시 부산으

    2011-06-20
  • <407>서울대 병원의 대학살

    13장 6.25 ⑯ 나는 7월 9일 부산에서 다시 대구로 올라와 경상북도 지사 조재천의 관사에 머물렀다. 그러나 전황은 불리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인민군의 남진을 아군은 육탄으로 막는 형국이었다. 인민군은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는데 서울대 병원의 대학살은 그 시작이었다

    2011-06-18
  • <406>국군 지원한 중학생

    13장 6.25 ⑮   7월 3일 한강 방위선이 무너졌다. 그러나 부산에 상륙한 미군이 대전을 지나 오산까지 북상했다. 1개 대대 병력이었지만 그 의미는 크다. 부산의 경상남도지사 양성봉의 관사를 숙소로 정한 내가 김장흥과 경관 두 명만 데리고 숙소를 나왔을 때는 7월

    2011-06-17
  • <405> 34세 총사령관 정일권

    13장 6.25 ⑭   6월 30일에 3군총사령관 겸 육참총장에 정일권을 임명했다. 정일권은 1917년생으로 당시 34세,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대위 계급으로 간도 헌병대장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는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군에 입대한 후에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을

    2011-06-16
  • <404> 소련 야크기의 헬기 공격

    13장 6.25 ⑬   조종사 이름은 스미스 중위, 젊다. 스물두어살이나 되었을까? 경비행기 안에는 나와 스미스 둘만 타고 있다. 2인승이기 때문이다. 맥아더와 작별하고 오후 6시경에 수원 비행장을 이륙한 비행기는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날아가고 있다.앞좌석에 앉은 나는

    2011-06-15
  • <403> 맥아더의 요구

    13장 6.25 ⑫   「각하, UN군이 곧 도착합니다.」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온 맥아더가 나에게로 다가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주위에  둘러선 한국군 지휘부도 들으라고 한 것 같다. 맥아더의 손을 잡은 내가 말했다.「장군, 결국은 미국, 소련의 대리전이 되겠지만 이

    2011-06-14